89세의 단색화 거장 하종현, '회화실험'에 70년 헌신한 그 강렬한 뚝심

2025-04-21

재료와 물성 실험에 평생 매진한 작가 하종현

국제갤러리 k1과 한옥서 신작·근작 30점 발표

특유의 배압법에 의한 '접합'연작,5월11일까지

[서울=뉴스핌]이영란 편집위원/미술전문기자=올해 89세의 단색화 거장 하종현(Ha Chong-Hyun). 한국적 모더니즘의 개척자로 꼽히는 그는 여전히 현재진행형 작가다. 근래들어 국내는 물론 글로벌 무대에서 작품세계가 각광받으면서 아흔을 앞둔 나이에도 작업을 활발히 이어나가고 있다.

그가 최근 완성한 신작과 근작들을 들고 서울 삼청로 국제갤러리에서 개인전을 열고 있다. 오는 5월 11일까지 열리는 이번 개인전에는 작가의 최신 연작 '이후 접합' 시리즈를 비롯해 다양한 회화들이 출품됐다.

오는 5월 11일까지 K1과 한옥에서 열리는 전시는 하종현이 국제갤러리에서 3년 만에 갖는 개인전이다. 하종현은 지난 2015년, 2019년, 2022년에 국제갤러리에서 개인전을 가졌다. 이번 작품전은 '회화란 무엇인가'라는 화두를 가슴에 품고 반세기 넘게 물성과 기법 실험에 매진해온 작가의 예술여정을 되짚어보는 자리다.

하종현은 접합(Conjunction)의 작가로 불린다. 1970년대부터 지금까지 계속 '접합'시리즈를 내놓고 있다. 이제는 작가의 트레이드 마크가 되버린 '접합'은 50여 년에 걸쳐 하종현을 대표하는 연작이 됐다. 하종현의 작업방식은 매우 독보적이다. 다른 화가들이 캔버스 앞면에 물감을 바르는 것과는 달리 화폭 뒷면에 물감을 바르는 것으로 작업을 시작한다. 그는 올이 굵은 마포 뒷면에 물감을 두껍게 바른 뒤 천의 앞면으로 물감을 밀어넣는 '배압법(背押法)'으로 작업한다. 앞면에 그리는 것에 비해 이 방식은 더 많은 공력이 필요하고, 뚝심도 요구된다. 이같은 쉽지 않은 기법을 고집하는 것은 평면에 공간의 개념을 좀더 독특하고 미묘하게 부여하기 위해서다.

6.25전쟁이 끝나고 사회 전체가 암울했던 시기에 화가로서 활동을 시작한 하종현은 전후 상황에서 쉽게 구할 수 있는 마포(마대 자루)라든가 철조망, 밀가루, 못 등으로 추상작업을 시도했다. 이들 재료는 당시 시대상을 직접적으로 반영하는 재료였다. 여기서 그치지 않고 직접 만든 도구들을 이용해 작업을 이어갔다. 이처럼 재료와 기법, 작업도구는 물론이고 모든 가능한 방법과 수단을 총동원해 회화에 대한 고정관념과 기존 관행을 뒤흔드는 실험을 끈질기게 시도했다.

이탈리아의 '아르테 포베라(가난한 예술)'그룹의 작가들이 1960년대 후반 비예술적이고 일상적인 재료들로 기존의 관습회된 미술계에 저항하며 인간의 본질을 탐구했듯 하종현 역시 누구도 미술의 재료로 여기지 않던 재료들을 적극적으로 작업에 끌여들여 하종현 만의 독창적인 예술세계를 구가한 바 있다. 실험정신이 펄펄 살아 꿈틀대는 그의 이같은 초기 작업은 최근 아트선재센터에 '하종현 5975(1959~1975)'라는 타이틀로 선보여져 크게 화제를 모았다. 이 특별전은 작가가 홍익대학교를 졸업하던 1959년부터 '접합' 연작이 나오기 시작한 1975년까지 대표작들이 나와 국내외 많은 미술팬을 매료시켰다.

이번 전시에는 작가의 대표적인 '접합' 연작과, 여기서 파생된 다채색의 '접합' 연작, 제스처의 자유분방함과 기법의 자연미가 강조된 최근의 '접합', 2009년부터 시작된 '포스트 접합'(Post-Conjunction) 연작등 근작과 신작 30여 점이 출품됐다. 타이틀은 모두 '접합'이거나 '이후 접합'이지만 쉼없이 변화하고 확장하는 하종현의 역동적인 작업세계를 살펴보기에 부족함이 없다.

우리 미술계에서는 하종현을 단색화 거장이라 칭하지만 이번 전시에는 색에 대한 동시대적 고민이 반영된 다채색의 '접합'시리즈가 K1 초입에 대거 출품됐다. 여든이 넘은 나이에도 실험과 파격을 거듭하는 노장의 투혼이 이들 다채색 접합 연작에서 오롯이 느껴진다. 기존의 '접합' 연작이 기왓장이나 백자를 연상시키는 한국적인 색상으로 이뤄진 것과 달리 다채색의 '접합'신작은 우리 삶에서 늘 마주치는 일상의 다양한 색상들이 과감하게 도입돼 보다 현대적이다.

또한 '접합' 신작에서는 캔버스 뒷면에서 힘하게 스트로크를 가한 작가의 붓 터치(mark-making)가 밝은 색이 섞인 그라데이션으로 강조돼 경쾌하면서도 신선함을 전해준다. 또 다른 '접합' 신작인 'Conjunction 24-52'(2024)는 마포 뒷면에서 밀어낸 물감이 앞면에서 자연스럽게 흘러내리는 '접합' 초기작을 연상시킨다. 초기작에서 자연의 흙색을 사용했던 작가는 신작에서는 그라데이션을 이용해 흰색을 보다 세련되게 표현하고 있다. 점성이 있는 물감이 부드럽게 흘러내리는 모습을 부각시킨 것에서는 한결 여유로와진 작가의 내면을 느끼게 한다.

작가는 자신의 '포스트(이후) 접합' 시리즈에 대해 '만선(滿船)의 기쁨'을 희열에 찬 원색의 화면으로 표현해봤다고 밝혔다. 즉 '포스트 접합' 연작은 기존 '접합' 연작의 주요 방법론이었던 배압법을 응용, 색과 형태뿐만 아니라 회화의 화면을 대하는 태도와 방식 자체를 재해석하고 탐구한 작업이다.

이 신작 시리즈는 작품 제작과정이 더욱 까다롭고 복잡하다. 나무 합판을 얇은 직선 형태로 길게 자른 후 그 조각들에 일일이 먹이나 물감을 칠한 한지, 광목 천, 마대 천, 캔버스 천 등으로 감싼다. 그리곤 이 나무 조각들을 화면에 수직 또는 수평으로 순차적으로 나열하는데, 틀에 하나의 나무 조각을 배치하고 가장자리에 유화 물감을 짠 다음 또 다른 나무 조각을 붙여 물감이 나무 조각 사이로 눌리며 스며나오도록 하는 기법을 계속 반복한다. 이렇게 스며나온 물감 위에 스크래치를 하거나 유화물감으로 덧칠하며 화면에 리듬감과 율동감을 더해야 비로소 작업이 완성된다.

이로써 형태와 색채, 뉘앙스가 기존의 '접합'과는 전혀 다른 작업이 우리 앞에 펼쳐지는 것이다. 이런 지난한 과정을 거쳐 보다 화려하고 오묘한 작품이 완성되는데 작가는 이를 일컬어 "만선의 기쁨"으로 표현하고 있다. 이는 곧 평면과 조각적 요소의 만남, 시대적 의미에 국한되지 않는 재료로의 확장 등 '접합'의 범주를 더 넓게 확장해나가는 작가로서의 성취감에 대한 표현이라 할 수 있다. 결국 하종현의 '접합'은 특정 작업 스타일을 지칭하는 용어라기 보다는 지지체와 유화물감의 접합, 평면과 오브제의 접합, 회화적 재료와 시대적 배경의 접합 등 광범위한 범주를 아우르는 넓은 의미에서 고유한 방법론인 셈이다.

◆하종현 작가는?=1935년 경상남도 산청에서 태어나 홍익대학교 회화과를 졸업했다. 홍익대학교 미술대학 학장(1990–1994)과 서울시립미술관 관장(2001–2006)을 역임했다. 하종현의 작업은 뉴욕, LA, 런던, 파리 등 세계 각국의 주요 갤러리에서 소개되며 많은 호응을 이끌어냈다. 또 대전시립미술관(2020), 국립현대미술관(2012), 경남도립미술관(2004), 밀라노 무디마 현대미술재단(2003) 등에서 개인전을 가졌다. LA 해머 미술관(2024), 뉴욕 솔로몬 R.구겐하임 미술관(2023), 덴버 미술관(2023), 뉴욕 현대미술관(2019), 상하이 파워롱 미술관(2018), 브루클린 미술관(2017), 벨기에 보고시안재단(2016), 시카고 미술관(2016) 등의 단체전에도 참여했다. 그의 작품은 뉴욕 현대미술관, 뉴욕 솔로몬 R.구겐하임 미술관, 시카고 미술관, 도쿄도 현대미술관, 파리 퐁피두센터, 홍콩 M+, 국립현대미술관, 리움미술관 등 세계 유수의 미술관에 소장돼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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