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문실은 암흑이었다. 다만 천장 네 귀퉁이에 붉은 전구가 희미하게 깜빡거리고 있었다. 첫 고문은 천장에서 내려진 밧줄에 두 팔을 꽁꽁 묶은 뒤 공중에 들어 올려 이리저리 흔들면서 몽둥이세례를 퍼붓는 것으로 시작됐다.”
얼마 전 세상을 떠난 정규웅 전 중앙일보 문화부장·논설위원이 생전에 남긴 국군 보안사령부(현 방첩사령부의 전신) 고문실의 기억이다. 전두환 정부가 출범하고 비상계엄을 해제한 지 4개월 정도 지난 1981년 5월에 있었던 일이다. 당시 중앙일보는 한수산 작가의 ‘욕망의 거리’라는 제목의 소설을 연재하고 있었다.
영장 없는 체포, 고문 도구 준비
44년 전과 12·3 계엄 닮은꼴
반성 없는 역사는 되풀이되나
보안사 요원들은 소설의 일부 표현을 문제 삼아 한 작가와 중앙일보 기자 세 명, 출판사 편집자 두 명을 악명 높던 서빙고 분실로 끌고 갔다. 이른바 ‘한수산 필화사건’이었다. 영장도 제시하지 않고 변호인의 조력을 받을 권리도 고지하지 않은 불법 연행이었다. 당시 보안사령관은 신군부 2인자였던 노태우 전 대통령이었다.
정규웅 전 부장도 그때 고문 피해자 중 한 명이었다. 그는 자신의 책(『1980년대 글동네의 그리운 풍경들』)에서 이렇게 적었다. “두 사병이 각목을 들고 가세해 부인하거나 대답을 하지 않으면 몽둥이세례를 퍼부었다. 잠시 양쪽 바지 자락을 들어 올리니 온통 시꺼멓게 죽어 있었고 곳곳에 피가 엉겨 붙어 있었다.”
2007년 국방부 과거사진상규명위원회가 펴낸 보고서를 보면 과거 보안사가 문제 삼은 부분은 사실 별것도 아니었다. 정부 고위관리가 ‘촌스러운 모자’를 쓰고 탄광촌을 찾았다가 돌아가는 길에 주민들과의 대화 내용을 다 잊어버린다는 부분과, 교통경찰 제복처럼 디자인한 회사 경비원 제복을 언급하며 군인 등 제복 좋아하는 사람을 풍자한 부분이었다. 이중 앞부분은 ‘국가원수의 헤어스타일(대머리)’을 웃음거리로 만들어 ‘정의사회 구현을 위한 대통령의 열정과 노력’을 무력화하려는 의도로 간주됐다. 뒷부분은 군 장병을 모욕하고 비하해 북한에 동조하는 이적 행위를 저질렀다며 ‘빨갱이 딱지’를 붙였다.
그때도 헌법에는 언론·출판의 자유와 예술의 자유가 명시돼 있었다. 하지만 보안사 요원들의 끔찍한 고문 앞에서 헌법 조항은 아무런 힘도 갖지 못했다. 몸과 마음이 만신창이가 된 한수산 작가는 “벌레가 되어 나는 다시 제주로 내려갔다. 그리고 벌레가 되어 살았다. 벌레도 산다”고 자신의 책(『용서를 위하여』)에 적었다. 자신을 벌레에 비유할 정도로 비참함과 절망감에 괴로워했던 작가의 심정이 느껴진다.
44년 전에 있었던 보안사의 불법 고문은 다시는 되풀이돼선 안 될 우리 현대사의 어두운 과거다. 그런데 지난해 12·3 비상계엄 사태는 참혹한 과거의 트라우마를 되살아나게 했다. 홍장원 전 국가정보원 1차장의 증언은 충격적이다. 그는 지난 22일 국회 국정조사특별위원회에 증인으로 출석해 비상계엄 당시 상황에 대해 진술했다.
홍 전 차장은 계엄 당일 윤 대통령과의 통화에서 “이번에 다 잡아들여서 싹 다 정리해라. 방첩사령부를 적극 지원하라”는 지시를 받았다고 말했다. 처음엔 간첩단 사건인가 생각했지만 여인형 전 방첩사령관에게서 체포 대상자 명단을 듣고 나서 정치인 체포 지시였다는 걸 알았다고 했다. 여 전 사령관이 불러준 명단에는 한동훈 전 국민의힘 대표,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표, 우원식 국회의장 등 14명이 있었다는 증언이다.
노상원 전 국군 정보사령관이 이른바 ‘부정선거’를 밝히겠다며 고문 도구를 준비하라고 지시한 정황도 군 검찰의 수사에서 드러났다. 노 전 사령관은 지난해 11월 ‘햄버거집 회동’에서 문상호 당시 정보사령관 등에게 “야구방망이·케이블타이·복면 등도 잘 준비하라”는 지침을 준 것으로 군 검찰은 파악했다. 그러면서 “일단 체포 관련 용품을 구입해오면 내가 돈을 주겠다. 장관님(김용현 전 국방부 장관) 지시이니 따라야 하지 않겠느냐”고 말했다고 한다.
군 검찰의 공소장에는 정보사 대령이 알루미늄 야구방망이 세 개와 케이블타이·안대·복면·밧줄 등을 준비했다는 내용도 담겨 있다. 북한도 아니고 21세기 대한민국 군대에서 실제로 고문 도구를 준비했다는 게 도저히 현실로 믿어지지 않는다.
18년 전 과거사진상규명위원회는 ‘한수산 필화사건’ 피해자들에 대한 공개 사과와 보상, 추가 조사가 이뤄져야 한다고 지적했다. 하지만 끝내 공개 사과는 없었다. 이번 계엄 사태의 주동자들도 사과나 반성 대신 억지와 궤변으로 어떻게든 법적 책임을 면해보려고 발버둥 치는 모습이다. 진솔한 반성이 없는 역사는 결국 이렇게 되풀이되는 것인지 씁쓸하기만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