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항.”
긴 휘슬과 함께 명령이 내려졌다. 경하배수량 8200t의 정조대왕함(DDG 995)이 부산 해군작전사령부 부두를 서서히 떠났다. 도선사의 지시에 따라 거대한 선체의 앞뒤에서 예인선이 배를 밀고 당겼다. 배 안에선 절대적 권위를 가진 함장도 항구를 벗어나기 전까지는 도선사 앞에 꿈쩍 못한다. 복잡한 항구에서의 안전 운항 때문이다.
기자는 지난달 31일 해군이 최신예 이지스 구축함인 정조대왕함에 편승했다. 지난해 12월 2일 정조대왕함이 취역한 뒤 첫 데뷔다. 취역은 해군이 인수한 함정을 함대세력표에 등재하고 취역기를 다는 과정을 말한다. 사람으로 치면 호적에 올리는 게 취역이다. 정조대왕하은 전력화 과정을 끝내지도 않았지만, 1일 기동함대사령부 창설을 맞아 언론에 공개했다.
이번 항해의 목적지는 제주 민군복합항(해군 제주기지). 기동함대의 보금자리다.
기자는 2023년 7월 시험평가 중의 정조대왕함을 타본 경험이 있다. 2년 만에 재회한 정조대왕함은 여전히 성(城)처럼 바다 위에 우뚝 섰다. 당시 정신없었던 함내는 잘 정리됐다.
10분 안에 적 탄도탄 요격
해군은 가상 상황에서의 탄도미사일 방어 작전과 대잠수함 작전의 절차 훈련을 벌였다. 1조 3000억원이 넘는 정조대왕함이 결코 허투루 한 투자가 아니라는 사실을 보여주고 싶은 눈치였다.
전투지휘실(CCC)은 정조대왕함의 두뇌다. 배를 조정하는 함교와 함께 함장을 주로 볼 수 있는 곳이 CCC다. CCC 안은 옅은 푸른 빛 아래 어둠침침했다. 무기와 장비를 조작하는 콘솔 화면을 잘 보이게 하려고 조도를 낮췄다. 각 콘솔엔 모니터가 3개 달렸다. 선배 이지스 구축함인 세종대왕급의 콘솔은 모니터가 1개씩이었다. 정조대왕함엔 모니터가 3개로 늘어나 신속한 지휘 결심과 상황 조치가 가능해졌다는 게 해군의 설명이다.
CCC 근무 인원은 전원 연소가 덜 되는 소재의 함상복을 입었다. 피격 상황을 대비하기 위해서였다.
다음은 가상 상황. 잠수함발사탄도미사일(SLBM) 탑재 잠수함 등 북한의 잠수함 수 척이 기지를 떠났다. 해상 도발 가능성이 높아진 가운데 함경북도 동쪽 바다의 적 SLBM 잠수함에서 미사일 발사 징후가 있다는 정보가 입수됐다.
동해에서 항해 중인 정조대왕함에 “총원 전투배치”가 떨어졌다. 대잠·대공 황색경보가 발령돼 전 승조원은 언제라도 교전할 수 있도록 준비를 갖췄다.
정조대왕함은 AN/SPY-1D(V) 레이더의 집중 탐색구역을 설정했다. 함교 아래의 4면에 붙인 이 레이더는 360도 전면에서 1000개의 항적을 탐지·추적할 수 있다.
미상의 발사체가 레이더 화면에 나타났다.
“파이어볼(Fireball).”
CCC가 긴박하게 움직였다.
“전 무장 즉각 사용준비.”
정조대왕함은 미확인 발사체의 제원을 공군 한국형 미사일방어(KAMD) 작전센터에 전송했다. 곧 적의 SLBM으로 식별됐다. 예상 탄착지역은 대한민국.
무력을 사용할 수 있는 ‘적성(敵性)선포’가 이뤄졌다. 정조대왕함은 교전계획에 따라 요격절차를 진행했다. 낮지만 단호한 목소리의 명령이 따랐다.
“요격미사일 발사 10초 전. 5, 4, 3, 2, 1, 발사!”
해군은 가상훈련에서 적 SLBM을 중간단계에서 요격한다고 설명했지만, 요격미사일의 종류에 대해선 함구했다. 그러나 정조대왕함이 중간단계의 탄도미사일을 요격할 수 있는 건 SM-3뿐이다. 방위사업청은 지난해 4월 SM-3를 해외 구매를 통해 확보하는 해상탄도탄요격유도탄 사업을 의결했다
전방 모니터에 적 SLBM의 항적과 요격 미사일의 항적 등 정보가 입체적으로 그려졌다.
“표적 도착 5초 전, 4, 3, 2, 1, 도착.”
레이더에 SLBM이 사라졌다. SLBM 파편이 떨어지는 모습도 보였다.
“마크 인디아(Mark India).”
요격 성공을 뜻하는 음어(陰語)다. 탐지부터 요격까지의 과정이 10분도 안 걸렸다.
정조대왕함은 세종대왕급과 달리 적 탄도탄을 탐지·추적은 물론 요격도 가능하다. 중간단계에서 SM-3로 놓친 적 탄도탄을 종말단계에서 SM-6로 잡을 수도 있다.
바닷속 깊숙이 숨은 잠수함 탐지
정조대왕함이 대잠 작전에 돌입했다.
다음은 가상 상황. 해상 경계작전 구역에 적 잠수함 다수가 움직이고 있다는 정보가 입수됐다. 정조대왕함은 근처 해역에서 비행 중인 P-3 오라이언 해상초계기와 교신을 주고받았다.
“소노부이 장착, 스탠바이(Stand-by), 드랍(Drop), 나우(Now), 나우(Now), 나우(Now).”
P-3가 바다로 떨어뜨린 능동 소노부이는 음파를 수중에 쏴 수중 접촉물을 탐지하는 소나다. 여러 곳의 소너부이가 적 잠수함을 몰아갔다.
정조대왕함에서 긴급출격한 링스해상작전헬기도 가세했다(기상이 안 좋아 가상으로 진행). 링스는 전속력으로 적 잠수함 예상위치로 날아간 뒤 호버링(제자리 비행)하면서 디핑소나를 내렸다.
정조대왕함의 최신형 통합 소나체계는 대잠전의 ‘치트키’다. 이 배엔 함수 고정형 소나(HMS), 가변 심도 저주파 능동 예인 소나(LFPA), 다기능 수동 예인 소너(MFTA) 등 모두 3종류의 소나가 달렸다. HMS는 세종대왕급보다 더 신형이라 성능이 더 뛰어나다.
LFATS는 적 잠수함의 최대 잠항 심도까지 내릴 수 있다. 여기서 쏜 저주파가 적 잠수함에 닿아 되돌아 오면 MFTA가 이를 잡아내 위치를 알아내는 방식이다. 이처럼 송신기와 수신기를 따로 운용하면 적 잠수함을 멀리서 정확하게 잡아낼 수 있다.
정조대왕함이 쏜 LFPA의 저주파는 사람 귀엔 새소리처럼 들렸다. 적 잠수함에겐 사신(死神)의 목소리일 게다.
정조대왕함이 수중 미식별 접촉물을 탐지했다. 그 해역엔 아군이나 우군 잠수함 활동이 없다는 사실을 확인했다. 정조대왕함은 미식별 수중 접촉물에 즉각 물 밖으로 부상할 것을 강요했다. 묵묵부답이었다.
이어 정조대왕함은 장거리 대잠유도무기인 홍상어를 발사했다. 홍상어는 경어뢰인 청상어를 미사일에 태워 멀리 쏘아 보내는 대잠무기다.
“홍상어 발사 10초 전, 5, 4, 3, 2, 1, 발사!”
“입수 남은 시간 10초, 5, 4, 3, 2, 1.”
“입수! 1, 2, 3, 4, 5.”
잠시 후 수십 m의 물기둥이 솟구쳐 올랐다. 수중정보실에선 수중 폭발음을 청취했다. 그때 정조대왕함은 어뢰로 보이는 수중 소음도 들었다. 또 다른 적 잠수함이었다. 적 어뢰로 판단한 정조대왕함은어뢰음향대항체계(TACM)을 발사하고 전속으로 변침했다.
“TACM 자동모드 4발 발사! 1번 발사, 2번 발사, 3번 발사, 4번 발사, 회피침로 000도.”
이와 동시에 정조대왕함은 적 잠수함을 청상어로 공격했다.
“청상어 우현 번 튜브 발사 완료!”
두 번째 적 잠수함도 침몰했다.
해군은 신형 해상초계기인 P-8 포세이돈과 신형 해상작전헬기인 MH-60R 시호크를 도입할 계획이다. 정조대왕함의 통합 소나체계에 이들 신형 공중전력까지 더해지면 적 잠수함이 숨을 곳이 좁아진다.
이날 가상훈련은 금방 끝났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다. 해군 관계자는 “대잠전의 영문 약자가 Anti-submarine Warfare의 ASW인데, 농담으로 Anti-sleep Warfare의 ASW이라고 한다”며 “실제 상황이라면 며칠간 잠도 못 자고 적 잠수함과 숨바꼭질할 수도 있다”고 말했다.
아파트 16층 높이서 배를 조종
정조대왕함의 데크(갑판)와 데크를 오르내리는 계단은 사다리에 가깝다. 조심했지만 머리를 한 번 부딪혔다. 한참을 올라가 함교에 도착했다. 배를 조종하는 함교는 16층짜리 아파트(48m)만큼 높았다. 이곳은 CCC와 함께 함장이 가장 자주 찾는다.
한밤중 함교는 컴컴했다. 어둠에 눈이 익숙해져 더 잘 볼 수 있도록 불을 다 껐다. 10분 정도 지나면 시선이 밝아진다고 한다.
제주로 가는 뱃길엔 통행량이 많았다. 수평선 너머 상선과 어선의 불빛이 눈에 들어왔다. 그래서 당직 근무자는 긴장을 놓칠 수 없었다. 함교 좌우엔 견시가 바닷바람을 견디며 주위를 살피고 있었다.
선상 생활은 롤링(좌우로 흔들림)과 피칭(앞뒤로 흔들림)이 일상이다. 제주에 가까워지니 3m 파도가 쳤다. 흔들다리 위에 선 느낌이었다. 이 같은 환경에 익숙한 정조대왕함 승조원은 무덤덤해 보였다.
함내 격실이 500개가 넘어 자칫 배 안에 길을 잃어버리기에 십상이다. 복도엔 비상시 파공(破空)을 메울 격목과 소방 장비를 비치한 빨간 상자가 곳곳에 보였다.
정조대왕함은 기동부대의 기함으로 쓸 수 있다. 세종대왕함급과 달리 따로 기동부대지휘소가 있다.
정조대왕함에서 독실은 함장과 부장(부함장), 기관장, 기동부대장에게만 주어진다. 사관(장교)이라도 2명이 방을 함께 쓴다. 기자는 중·하사 침실을 배정받았다. 정원은 9명. 3층 침대 3개와 개인별 로커 9개가 놓였다. 침대에 누워봤다. 1m 77㎝ 키의 기자 발끝에 남은 공간이 많지 않았다. 머리 쪽엔 조그만 등과 충전 소켓이 있었다.
정조대왕함엔 여군 25명까지 탈 수 있다. 이들에겐 별도 공간이 마련됐다. 간단한 수술과 방사선 촬영까지 할 수 있는 의무실, 러닝머신을 놓은 체력단련실, 군것질거리를 살 수 있는 PX도 있다.
함명인 정조대왕함은 조선의 중흥을 이끈 22대 국왕 정조에서 따왔다. 선덕여왕, 영조대왕, 근초고왕를 제치고 선정된 이유가 그가 재위 시절 문무에 능했고, 군사에 밝았기 때문이었다. 2번 함은 다산정약용함이다. 다산 정약용은 정조가 아낀 신하였다.
정조대왕함 부대 마크의 ‘정조대왕함’은 정조의 한글 필체를 모아 만들었다.
해군 창군 80주년에 기동함대 창설
정조대왕함은 해상 작전과 상륙 작전 지원뿐만 아니라 킬체인·한국형 미사일 방어·대량응징보복의 3축 체계를 담당하는 전력이다. 함대지 순항미사일에 함대지 탄도미사일까지 더해 유사시 북한 전역의 목표를 타격할 수 있다. 또 북한 미사일을 요격할 수 있다. 이 배가 해상의 간성(干城)이라 불리는 이유다.
정조대왕함은 국가 정책에 따라 해외로 나가 국제 안보에 기여할 능력을 갖췄다. 비전통 위협도 대응할 수 있다. 앞으로 무인기와 무인함을 운용할 수 있다.
더 나아가 해군은 1일 기동함대를 창설했다. 한반도 주변의 관할해역뿐만 아니라 전 세계 바다로 나가 해상교통로를 지키는 부대가 기동함대다. 1989년 10월 기동함대를 처음 계획한 뒤 36년 만에 현실화했다. 올해로 80주년을 맞은 해군에 경사다.
기동함대는 지금은 구축함 10척과 군수지원함 4척으로 꾸려진다. 2030년대엔 구축함이 18척으로 늘어난다. 이 중 6척은 이지스 구축함, 6척은 ‘미니 이지스’라 불리는 한국형 차기 구축함(KDDX)이다.
기동함대는 ▶북한의 핵·미사일을 억제하고 ▶대한민국의 해상 권익을 보호하며 ▶해상교통로 보호·해외파병 임무를 수행한다. 해군 관계자는 “국제 해양질서가 점점 불안정해지고 있다”며 “‘지켜야 하는 바다’에서 ‘도전하는 바다’로 해군의 항로를 바꿔야 할 때”라고 설명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