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엄이 정당화한 ‘적대적 두 국가론’

2025-02-12

12·3 비상계엄 시기 소집된 HID(북파공작원) 요원들에게 선거관리위원회 직원들을 체포·심문하는 것 외에 어떤 임무가 부여됐는지는 아직 베일에 싸여 있다. 정보사가 구입한 북한군복 170벌 용도도 분명치 않다. HID 동원 총책인 노상원 전 정보사령관의 수첩 메모 조각들을 맞춰보면 정치·노동·종교·법조·언론계 ‘문제 인사’들을 체포한 뒤 배에 태워 북방한계선(NLL) 근처 해상에서 선박째 폭파시키는 그림이 그려진다. 노상원은 2016년 대북 임무를 마친 요원들에게 원격 폭탄조끼를 입혀 귀환 전 폭사시키라고 지시했다고 한다. 그렇다면 북한군으로 위장한 HID 요원들에게 ‘반윤 인사’들을 처리토록 한 뒤 요원들까지 제거해 증거를 없앤 다음 이를 북한 소행으로 모는 ‘북풍공작’을 시도했을 것이란 극단적 추론도 성립한다.

윤석열 ‘북풍공작’ 정황은 그 외에도 여러 가지다. 무장한 정보사 블랙요원들이 계엄 해제 뒤에도 한동안 청주·대구공항과 사드기지 인근에서 대기 중이었다는 의혹은 민주당이 받은 제보들이 꽤 구체적이다. 정보사 요원들이 계엄 직전 몽골 북한대사관과 접촉을 시도한 경위, 수도방위사령부가 차량공유 업체에 ‘북한군이 공유차량을 이용해 도주하면 추적 가능하냐’는 황당한 문의를 한 이유도 북풍공작과 무관해 보이지 않다. 대통령실에 배속된 HID 장교가 누구 지시로 파견돼 어떤 임무를 수행했는지도 의문이다. 전모를 밝히지 않고 어정쩡하게 앙금을 남기면 또 어떤 후환이 벌어질지 모른다.

HID의 게릴라식 북풍공작에 앞서 윤석열은 계엄 1년 전부터 정규군을 동원해 대북 도발을 본격화했다. 2023년 11월 해주의 4군단 등 북한군 전방 4개 군단에 대한 타격 계획이 대통령실 지시로 작성됐다(실무부서 반대로 무산됐다). 2024년 들어 북한이 대북전단에 오물 풍선으로 대응하자 군은 대북 확성기 방송을 재개했다. 6월에는 7년 만에 NLL 부근에서 해상사격 훈련을 실시했다. K-9 자주포와 다연장로켓 천무, 스파이크 미사일 등 첨단 무기로 6월 290여발, 8월 390여발, 11월 200여발을 북쪽을 향해 발사했다. 10월에는 무인기가 세 차례 평양에 진입해 대북전단을 살포했다. 2㎞ 밖에서도 들릴 정도로 소음이 큰 괴물체가 평양 상공에 출현해 북한 수뇌부를 발칵 뒤집었다.

그럼에도 북한이 대응을 자제한 것은 ‘무슨 짓을 저지를지 모를 윤석열과 상종하지 않는 게 자위 조치’라고 판단했기 때문일 것이다. 북한은 “제발 좀 서로 의식하지 말며 살았으면 하는 게 간절한 소원”(2022년 8월 김여정 담화)이라며 정권 초기부터 선을 그었다. 지난해에는 ‘적대적 두 국가 관계’ 선언, 경의선·동해선 남북 연결 도로 폭파, 콘크리트 방벽 설치 등 이론과 현실 양쪽에서 ‘방화벽’을 쳤다. 무인기가 평양에 날아온 며칠 뒤 김정은 국무위원장은 “그 인간들과는 마주 서고 싶지도 않다”면서도 “대한민국을 공격할 의사가 전혀 없다”고 했다. 1년여간의 ‘전쟁 빌드업’에도 북한이 말려들지 않자 윤석열은 북풍을 엮은 계엄을 실행에 옮겼다.

1990년대 북한은 ‘인민을 먹여 살리지 못하는’ 권력임이 드러났고, 한국은 민주주의와 경제발전을 동시에 성취했다. 북한과의 체제 경쟁은 무의미해진 지 오래다. 그러나 윤석열의 불법계엄에 따른 헌정 중단 시도로 민주주의가 위기에 처했고, 권력유지를 위해 남을 집적거리는 ‘불량국가’식 악행으로 수십년간 쌓은 한국의 평판이 추락했다. 북한은 유엔 산하 국제민간항공기구(ICAO)에 ‘무인기 평양 침투’의 진상조사를 요청했다. 한국의 ‘대북 도발’이 국제 이슈가 되는 참담한 상황이 벌어지게 됐다. 윤석열의 망동은 북한의 ‘적대적 두 국가론’을 정당화시켰다.

비상계엄은 한·미 동맹에도 생채기를 남겼다. 브래드 셔먼 미국 연방 하원의원이 “북한 도발이 없을 때 위장 작전으로 발발한 전쟁으로 병력이 죽는 것을 미국은 원치 않는다”(MBC 12월12일 인터뷰)고 한 것은 빈말이 아니다. 부승찬 민주당 의원은 “주한미군이 계엄 사태에 휩쓸릴 가능성을 우려했던 것 같다”고 했다.

트럼프 2기 행정부에서 재개될 북·미 대화에서 한국은 발언권 없이 ‘패싱’당할 우려가 크다. 북한은 물론이고, 북한에 한껏 공들이고 있는 트럼프에게 한국은 불편한 존재다. 발언권을 얻으려면 값비싼 대가를 치러야 하지만, 그래본들 얻는 게 별로 없을 것 같다. 모든 걸 없던 일로 되돌릴 순 없다. 계엄과 ‘북풍공작’에 대한 철저한 진상규명이 국제사회에서 신뢰를 회복하기 위한 첫걸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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