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정치권과 정부가 업계와 머리를 맞대고 ‘디스플레이 산업 경쟁력 강화 특별법(가칭)’ 도입에 나선 것은 한국이 유기발광다이오드(OLED)와 같은 고부가가치 디스플레이에서 유지하던 경쟁 우위까지 빼앗길 수 있다는 위기감이 심화하고 있기 때문이다. 포괄적인 정책 지원이 이뤄지지 않으면 OLED마저 우리나라가 세계 1위를 하다 중국에 주도권을 내준 액정표시장치(LCD)의 전철을 밟을 수 있다는 우려가 확산하는 실정이다.
21일 디스플레이 업계에 따르면 중국 디스플레이 업체들이 2~3년 내 OLED 시장에서 한국의 생산량을 추월할 것이라는 우려 섞인 전망이 잇따르고 있다. 시장조사 업체 옴디아는 스마트폰에 들어가는 중소형 OLED 시장에서 중국 업체들의 생산 능력(캐파)이 2027년 한국을 역전할 것이라고 전망했다. 불과 10년 전인 2015년만 해도 이 시장에서 중국 업체들의 생산 능력은 한국의 3%에 불과했지만 지난해 거의 비슷한 수준까지 격차를 줄였다. 실제 전체 OLED 출하량에서 한국은 지난해 1분기 시장점유율이 49%에 그쳐 사상 처음으로 중국(49.7%)에 역전을 허용한 바 있다.
중국 업체들의 빠른 추격이 가능했던 것은 디스플레이 공장 건설부터 가동, 인재 육성까지 전 단계에 걸친 정부의 전폭적인 지원책 영향이 크다. 중국 정부는 공장 설립 시 필요한 토지를 무상 대여하고 제조 장비를 기업이 구매할 때도 보조금을 50% 이상 지원하고 있다. 생산 단계에서는 목표 수율을 달성하면 격려금을, 적자가 나면 보조금을 주는 방식으로 지원한다. 과감한 투자 및 물량 공세로 LCD 세계시장 1위를 차지한 경험을 교본 삼아 OLED에도 막대한 자원을 쏟아붓고 있는 것이다.
8.6세대 정보기술(IT) OLED 생산 투자를 2년 전 결정한 BOE가 대표 사례다. 전체 투자액 11조 원 중 BOE의 부담은 30% 수준으로 알려졌다. 나머지 70%는 지방정부(30%)와 은행 대출(40%)을 통해 조달했다. 앞서 2010년부터 2019년까지 BOE가 10년간 받은 정부 보조금만 118억 5500만 위안(약 2조 3000억 원) 규모로 추산된다.

우리나라도 연구개발(R&D)과 시설 투자에 대한 세제 혜택이 일부 있지만 중국과 비교하면 극히 미미한 수준이다. 여기에 주52시간 규제로 R&D 경쟁력마저 추락하고 있다는 우려가 나오고 있다. 중국은 핵심 R&D 인력에 대해 무제한 근무를 허용하고 있는 데다 정부의 보조금 지원 덕분에 수익이 나지 않는 차세대 기술 경험을 쌓는 것도 유리하다. 현재 국내 기업들이 중국에 비해 2~3년의 OLED 기술 격차를 확보하고 있지만 이마저 급속히 허물어질 수 있는 셈이다.
업계의 한 관계자는 “중국의 추격전이 심화하는 상황에서 주52시간 근무 등의 규제로 차세대 제품의 기술 격차를 확보하지 못하고 있다”면서 “반도체특별법이 아직 통과되지 않았지만 이를 기다리고 있을 수만은 없고 디스플레이 산업의 특성을 반영한 특별법이 절실한 상황”이라고 말했다.
지난해 글로벌 OLED 시장 규모는 2023년 대비 26.2% 상승한 540억 달러를 기록했고 2032년에는 시장 규모가 1330억 달러(약 157조 원)를 넘어설 것으로 예상된다. 생산 거점이 국내에 몰려 있는 만큼 지역 경제에 미치는 영향도 크다. 삼성디스플레이가 위치한 천안·아산의 10개 산업 단지에는 773개 디스플레이 관련 기업이 있고 고용 인원만 5만 7000여 명에 달한다.
LG디스플레이(034220)의 근거지인 파주에도 수백 개의 협력사들을 합해 2만 명을 훌쩍 넘는 인원이 근무하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중국에 디스플레이 주도권을 뺐기면 거대 시장에서의 입지 축소는 물론 지역 경제의 타격도 불가피하다. OLED 패널을 사용하는 전자와 자동차·방위산업 역시 악영향을 입게 될 것도 명약관화하다.
마이크로 발광다이오드(LED)나 방산용 패널 등 차세대 산업 육성 측면에서도 정부 지원이 절실하다는 목소리가 나온다. 과거 LCD와 OLED의 경우 한국이 먼저 시장을 개척한 뒤 중국이 추격하는 양상이었다면 차세대 디스플레이 분야에서는 중국이 먼저 생태계를 구축하며 치고 나오는 형국이다. BOE는 LED 제조 업체 HC세미텍을 인수해 신공장을 지었고 지난해 말부터 6인치 웨이퍼 기반 마이크로 LED 생산을 시작했다. 반면 국내에서는 삼성디스플레이가 웨어러블용 마이크로 LED 시제품을 선보였지만 대량 양산이 아닌 R&D 단계에 머물러 있다.
이동욱 디스플레이산업협회 부회장은 “디스플레이는 TV와 모바일을 넘어 모빌리티와 확장현실(XR) 등 다양한 제품들에 탑재되지만 산업 중요성에 대한 인식은 낮다” 면서 “경쟁력 강화와 기술 초격차 회복을 위해 특별법 제정을 통한 전폭적인 지원 확대가 꼭 필요하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