웃통 벗고 하는 씨름? 경기복 입혀 ‘모래바람’ 일으킬 것

2025-02-28

[정영재의 스포츠 인사이드] 이준희 신임 대한씨름협회 회장

1970~80년대 전성기를 누렸던 프로복싱·프로레슬링·민속씨름의 공통점은 뭘까. 웃통을 벗고 싸운다는 것이다. 팬티 한 장만 달랑 걸친 근육질의 사내들이 상대를 눕히기 위해 죽을힘을 다했다. 링에서는 피가 튀었고 씨름판에서는 모래가 튀었다.

세상이 바뀌었다. 4대 구기종목(축구·야구·농구·배구)은 프로 리그로 굳건하게 자리를 잡았다. 경기력 못지않게 패션 센스를 뽐낼 수 있는 종목들이 인기를 누린다. 골프와 테니스가 대표적이다. ‘벗은 몸의 사내들’이 하는 종목들은 겨우 명맥을 이어가고 있다. 우리나라 전통 스포츠인 씨름도 마찬가지다.

지난 1월 21일, 대한씨름협회 제 44대 회장 선거가 열렸다. 민속씨름 천하장사 출신인 ‘모래판의 신사’ 이준희(68)씨가 당선됐다. 3명이 출마했는데 이 후보가 62.5%의 압도적인 득표율로 승리했다.

지난달 20일 서울 올림픽회관 내 대한씨름협회에서 이 회장을 만났다. 그는 “변하지 않으면 죽는다는 절박함과 이준희에 대한 기대감이 작용한 것 같다. 산적한 문제들을 하나하나 풀어가겠다”고 말했다. 천하장사 3회, 백두장사 7회 우승을 거뒀던 그는 뛰어난 기술과 깨끗한 매너로 큰 사랑을 받았다. 현역 은퇴 후 민속씨름 경기위원장, 씨름협회 경기운영총괄본부장 등을 맡아 행정 경험을 쌓았다.

씨름 부흥, 어디서부터 풀어가야 할까. 이 회장은 뜻밖에 ‘알맹이’보다 ‘포장’을 먼저 얘기했다.

“단원 김홍도의 씨름 그림이나 과거 자료들을 보면 저고리와 바지를 입고 경기를 한다. 선수들의 멋진 몸매가 드러나면서도 세련되고 편한 씨름 경기복을 만들면 좋겠다. 여기에 광고도 넣을 수 있으니 일석이조 아닌가.”

여자부와 생활체육 선수들의 참여가 늘어나는 씨름판에서 ‘씨름은 웃통 벗고 하는 경기’라는 고정관념을 깰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남자부(소백·태백·금강·한라·백두)는 산 이름, 여자부(매화·국화·무궁화)는 꽃 이름인 체급 명칭도 시대에 맞지 않는 느낌이다. 다른 체급종목처럼 -80㎏급, -70㎏급 등으로 바꾸는 것도 논의 중이다.

천하장사 출신, 63% 압도적 득표율로 당선

역피라미드형 선수층도 문제다. 남자 실업팀은 19개가 세미프로 형식으로 운영되는데 18개는 시·군·구청 소속이다. 계약금과 연봉, 상금을 합쳐 수억원의 연 수입을 올리는 선수들도 꽤 있지만 지자체 소속이라 공개를 꺼린다. 도발적인 언행으로 유명했던 강호동이나 ‘람바다’ 춤을 춘 박광덕처럼 화려한 쇼맨십과 입담으로 자신을 어필하는 선수들도 많지 않다. 다른 프로 종목에 비해 선수들이 수줍음을 타는 데다 각 팀에 홍보와 마케팅을 전담할 인력도 없다.

프로와 아마추어 사이에 어정쩡한 위상이긴 하지만 실업팀은 25개(여자부 6개 포함)가 운영되고 있다. 하지만 이들을 받쳐줄 유소년 선수층은 빈약하다. 초등부는 대회별로 출전 팀 숫자가 들쑥날쑥이다. 30팀 이상 출전하는 대회가 있는가 하면 10팀만 나오는 대회도 있다. 초등학교에 모래밭 씨름장이 사라진 상황에서 아이들은 실내에서 매트를 깔고 경기와 훈련을 한다. 이 과정에서 발가락·발목이 꺾이거나 매트에 쓸려 부상을 당하는 경우도 있다. 씨름협회는 방과후교실 과목으로 편성해 씨름을 즐기는 아이들이 늘어나도록 유도하고 그 속에서 꿈나무를 발굴하겠다는 구상을 갖고 있다. 학교에 매트 보내기 운동도 전개하고 있다.

방과후교실 과목 편성해 인재 발굴 구상도

일본의 스모를 포함해 몽골·스페인 등 각 나라에 씨름과 유사한 전통 종목은 많다. 우리나라 씨름만의 강점을 이 회장은 ‘샅바’에서 찾았다. “샅바는 힘을 모아서 쓸 수 있게 해 주니까 작은 선수가 큰 선수를 이길 수 있다. 다양한 손기술·발기술·허리기술을 쓸 수 있는 것도 샅바가 있기에 가능하다. 일본 스모에서는 하와이·몽골계 장사들이 우승도 하지만 우리 민속씨름에 출전하는 외국인 선수들은 힘이 출중하지만 8강 이상 못 올라간다. 샅바를 이용한 ‘드는 씨름’에 약하기 때문이다.”

과거 민속씨름에서 ‘오뚝이’ 손상주, ‘털보’ 이승삼 등이 거구의 상대를 장쾌한 뒤집기 기술로 눕히곤 했다. 우리 씨름에는 단순한 힘겨루기를 넘어선 기술과 스피드, 다이내믹함이 있다. 민속씨름이 침체기에 접어든 건 150㎏ 안팎의 거구들이 힘겨루기와 밀어내기, 지루한 샅바싸움으로 일관하면서부터였다.

다행히 지금은 선수들의 체격과 파워도 커졌지만 다양한 기술과 스피드를 보유하고 있어 “씨름이 재미있고 화려해졌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현역 최강인 ‘괴물’ 김민재(23·영암군청)는 1m90㎝, 146㎏의 거구임에도 날렵하고 부드러운 몸놀림과 현란한 기술로 사랑받고 있다. 이 회장은 “씨름판의 박진감과 현장감을 높이기 위해 관중석을 경기장 쪽으로 바짝 당기고, 카메라도 근접 촬영할 수 있도록 조정하겠다”고 말했다.

2018년 씨름이 유네스코 인류무형문화유산에 등재됐다. 남북한 공동 신청의 결과다. 남북한 씨름은 용어가 조금 다를 뿐 큰 차이점은 없다. 북한은 모래가 아닌 매트에서 경기를 하고, 시작할 때 선 채로 샅바를 잡기 때문에 지나친 샅바싸움을 하지 않는다.

우리 고유의 전통 스포츠인 씨름이 남북한에서 명맥을 유지하고 있다는 점은 다행스럽다. 씨름이 국내는 물론 세계로 뻗어나가 사랑받느냐, 박제된 무형문화재로 남느냐는 씨름인들의 노력에 달려 있다. 이준희 회장은 “협회 내에 씨름발전위원회를 구성해 경기복 도입, 체급명칭 변경, 씨름전용채널 설립, 실업팀 연봉 샐러리캡 도입 등 현안들을 차근차근 풀어가겠다”고 약속했다.

정영재 칼럼니스트. 중앙일보·중앙SUNDAY 스포츠 기자 출신 칼럼니스트. 2013년 스포츠 기자의 최고 영예인 ‘이길용체육기자상’을 받았다. 연세대 국문학과·언론홍보대학원을 거쳐 한국체대에서 박사학위(스포츠산업경영)를 받았고 대학 등에서 강의하고 있다. 『스포츠 다큐: 죽은 철인의 사회』 등 저서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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