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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월의 첫날은 우리에게 봄을 알린다. 무거운 이부자리나 거추장스러운 옷에 눌렸던 몸이 가벼워진다. 온 누리에 빛이 넘친다. 자유다. 해방이다. 새로운 세상이다. 주변이 모두 되살아난 듯 생기에 넘친다. 그런데 갑자기 어두운 비바람, 폭풍이 불어닥친다. 즐거운 사람들, 소생하는 생명들이 잔혹한 폭력에 슬어진다. 3월 1일, 기미 독립 만세 운동을 생각할 때마다 나에게 자연스러운 연상으로 떠오르는 장면들이다.
세계와 인류가 나아갈 길을 제시
유교·기독교와 계몽정신 등 포괄
한국의 독립은 세계사적 문제 강조
대한민국 건설의 기반 구축에 기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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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정부 때의 일이다. 반관반민의 구성으로 매년 열리는 한·미·일 3국의 연례 회의에 참석한 일이 있었다. 그해의 회의 장소는 미국 워싱턴이었다. 이틀에 걸쳐서 여러 주제를 토의하였다. 때가 때인 만큼 껄끄러운 부분들이 많았다. 마지막 날에는 언론을 포함 외부의 인사들이 참여하는 공개 세션이 있었다. 일본 측의 대표로 나온 분은 외무성의 고위직 출신이라고 들었다. 이분은 한국 정부가 한·일 양국 사이에 이루어진 합의를 지키지 않고 갈등 만을 증폭시켰고, 그 때문에 양국 관계는 현재 최악의 상태에 이르렀다고 강경한 표현으로 비판하였다. 나는 그의 주장을 반박하는 대신 조금 엉뚱한 발언으로 좌중을 웃긴 기억이 있다. 나는 일본 측의 주장과는 달리 한·일 관계는 지금 매우 우수하다고 조금 억지 주장을 폈다. 역사적 사례를 들면서 일본의 나쁜 처사로 한·일 관계가 매우 나빴던 경우가 많았다고 했다. 그 대표적인 예로 기미년 3·1 운동을 들었다. 당시 일본은 이 운동의 의미를 제대로 깨닫지 못하고 억지와 폭력으로 억압해 많은 희생자가 발생했다고 설명했다. 그때에 비하여 한·일 관계가 매우 좋다는 이야기였다. 관중들 사이에서 웃음이 터져 나오고 일본 측의 발표자는 쓴 표정이 되었다.
공개석상에서 이런 발언을 한 것은 그저 일본 측의 주장을 반박하기 위한 것만은 아니었다. 나는 일본 근무 중 많은 사려 깊은 분들을 만났는데 그런 분들에게 꼭 읽어 보시라고 권하면서 드리는 문서가 둘이 있었다. 바로 기미 독립선언서와 안중근 의사의 동양평화론이었다. 이 두 문서를 중시한 것은 이들이 한국의 독립 투쟁에 관련된 것이었기 때문만이 아니었다. 동양평화론은 아마도 정치학자 데이비드 미트라니가 주창한 기능주의적 접근에 의한 국제 협력과 평화 추구 이론이 나오기 훨씬 앞서 이를 동아시아에서 주장한 문헌이다. 더욱 중요한 것은 앞으로 이 지역에 닥쳐오는 큰 재앙을 미리 보는 혜안과 함께 이를 어떻게든 함께 막아야 하는 것을 역설하고 있는 것이다.(“동양의 수억 황인종 가운데 수많은 뜻있는 인사와 정의로운 사나이가 어찌 수수방관하고 앉아서 동양 전체가 까맣게 타죽는 참상을 기다리기만 할 것이며…”) 그리고 기미 독립선언서는 이보다 더 큰 맥락에서 인류 문명의 대세와 세계가 나아갈 길을 설파하고 있다.
특히 19세기에는 서양 문물의 우수성이 전해지면서 아시아권 나라들이 여기에 어떻게 대응하는가 하는 것이 큰 문제로 대두되었다. 이때 나온 이야기들이 각기 ‘동도서기(東道西器)’ ‘화혼양재(和魂洋才)’ 혹은 ‘중체서용(中體西用)’ 같은 것이었다. 이들은 모두 서양 근대의 물질적인 우수함은 받아들이더라도 자신들의 정신적인 정체성은 그대로 지킨다는 취지였는데, 물론 잘 되기 어려웠다.
다른 면에서 서양의 근대는 서로 엇갈리는 메시지들을 전달한 것도 사실이다. 인간의 주체성에 기반한 해방의 메시지와 함께 절대적인 신에 의지하는 구원의 복음도 함께 전해졌다. 한국은 아마도 아시아에서 유일하게 서로 모순이 될 수도 있는 기독교와 근대성을 함께 받아들여 성공한 나라가 아닌가 한다. 여하간 산업화의 성공에 따른 물질적 풍요가 무제한의 탐욕을 낳고 이것이 부국강병이나 착취 그리고 약육강식 같은 실제로 이어지는 것도 함께 전해진 것이다.
근대화의 모순은 인류 역사상 전례 없는 살상과 파괴가 극심한 두 차례에 걸친 대전으로 이어졌고 일본의 참여로 아시아도 이 참화에 이끌려 들어갔다. 기미 독립선언서는 인류가 처음으로 겪은 전 세계에 걸친 무의미한 참화가 끝난 시점에 나온 세계사적인 문서이다. 이 문서는 한국의 독립을 주장하면서 이것이 단지 한국에 국한된 문제가 아니라 세계사적인 대전환의 문제임을 조명한다. 서양 근대화에 내재한 모순을 지적하고 새로운 세계사적인 전망이 어떻게 한국의 독립으로 가능한 것인지 설파하고 있다. 일본의 지도층이 이 운동의 진정한 의미를 제대로 이해하였더라면 그 이후에 세상은, 혹은 적어도 아시아는 달라졌을 수도 있었다. 결국 일본인 자신들도 이 엄청난 재앙에서 자유롭지 않았고 다른 어느 나라 국민 못지않은 고난을 겪었다.
기미 독립선언서가 너무 난해하고 현학적이며 투쟁 의식이 박약하다는 비판이 있는 것도 이해할 수 있다. 단지 이 선언의 전망은 그저 일본의 잘못을 척결하고 한국의 독립을 주장하는 것에 국한된 것이 아니라 인류와 세계사적인 전망을 함께 겨냥한 것이라는 의미에서 이해할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이 문서는 유교와 기독교 그리고 서양 근대 계몽정신 등을 포괄한 것으로서, 목전의 투쟁의 면이 약하였을지라도 그만큼 대한민국 건설의 기반을 넓혔다고 믿는다. (1920년 3월 15일 임시정부 의정원 법제 위원 라용균은 법제위에서 독립선언일을 3월 1일로, 건국기념일을 4253년 전 음력 10월 3일의 양력 날짜로 삼자는 제의를 했다. 그 제의가 통과되었고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1945년 해방의 날까지 두 날을 기념하였다.)
라종일 동국대 석좌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