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태환의 세상만사 경제학] 인플레이션세
연말이다. 예전에는 이맘때면 사람들이 세뱃돈으로 쓰기 위해 ‘신권’, 즉 빳빳한 새 돈을 구하러 은행에 가곤 했다. 요즘도 명절 무렵이면 헌 돈을 새 돈으로 바꿔주긴 하지만 교환 가능한 금액에 제한이 있고, 평소에는 신권 구하기가 좀 어렵다. 2022년부터 한국은행이 화폐 발행 비용을 아끼려 애쓰고 있기 때문이다.

누구나 그랬겠지만 필자도 어렸을 때 처음 ‘돈’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을 때 참 신기했다. 종이에다가 잉크로 숫자를 쓰고 특별한 무늬를 넣으면 그게 만원짜리가 되고 오천원짜리가 되는 마법. 나도 저렇게 돈을 만들어낼 수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현대 경제에서 사용되는 종이 화폐의 경우, 이처럼 인쇄하는 데 들어가는 재료비보다 완성된 화폐가 훨씬 큰 가치를 갖는다는 걸 어린아이들도 직감적으로 안다. 이때 법정 액면가치에서 제조비용을 뺀 값인 화폐주조차익을 가리키는 경제용어가 ‘시뇨리지’(seigniorage, 영어식으로는 세이뇨리지)다. 만약 누구나 이 시뇨리지를 통해 돈을 벌 수 있게 허가해 준다면 사람들이 돈을 찍는 데만 혈안이 되어 실물 경제활동은 등한시할 것이니 경제가 제대로 돌아갈 리 없다. 그래서 국가 전체에 통용되는 화폐를 만들어낼 수 있는 권한과 능력은 오직 정부나 중앙은행만이 가지고 있다. 조폐국이 아닌 곳에서 화폐를 만들려고 했다가는 화폐위조범으로 감옥에 가기 십상이다.
액면가보다 싼 재료비…악화가 양화 구축

이런 아이디어를 재미있게 비틀어서 만든 드라마가 ‘종이의 집’(La Casa de Papel, 영어 제목 Money Heist)이었다. 넷플릭스에서 2017년부터 2021년까지 다섯 시즌에 걸쳐 방영한 스페인 드라마인데 한 무리의 강도들이 조폐국을 터는 내용이 중심이다. 일반적인 영화나 드라마에 나오는 은행강도들이 이미 만들어져 있는 화폐나 귀금속을 훔치는 것과 비교한다면, 은행강도가 아예 조폐국을 점령해서 새 돈을 찍어내어 가져간다는 이 드라마의 설정은 상당히 독특한 발상의 전환이라 하겠다.
아무튼 돈은 아무나 찍을 수 없다. 지금은 화폐주조권을 정부나 중앙은행만이 갖고 있고, 중세나 근대에는 왕이나 봉건영주들이 금화나 은화의 주조권을 독점하고 있었다. 잠깐, 금화나 은화의 경우에도 재료비보다 화폐의 액면가가 더 컸을까? 예를 들어 액면가 1파운드짜리 은화 안에 재료로 들어간 은의 가치가 1파운드보다 작았을까? 정답은 “그렇다”이다. 사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금화나 은화는 물리적으로 녹여서 다른 모양의 금이나 은으로 바꿀 수 있는데, 1파운드짜리 은화를 녹여서 얻어지는 은의 가치가 1파운드보다 크다면 누구나 손에 들어오는 은화들을 다 녹여서 은 덩어리로 팔거나 은 장신구를 만들 것이다. 이러면 화폐가 제대로 유통이 될 수가 없다. 그래서 아주 오래전부터 금속화폐는 액면가보다 낮은 가치를 가진 금속으로 주조했다. 그렇다면 화폐 발행권을 독점하고 있는 봉건영주나 절대군주는 화폐를 발행할 때마다 돈을 벌었다는 얘기다. 시뇨리지라는 용어가 봉건영주를 부르던 말에서 온 이유가 바로 이것이다.
금화나 은화는 재료비가 법정 액면가치보다 낮아야 했을 뿐만 아니라, 그 재료비가 일정해야 했다. 그렇지 않으면 문제가 생긴다. 예를 들어 똑같은 1파운드짜리 은화인데 한 종류는 은이 5% 들어 있고 다른 한 종류는 은이 10% 들어 있다고 해 보자. 은화를 녹일 수 있는 대장장이가 은 함유량 10%짜리 은화를 얻으면 무엇을 할까? 이걸 녹여서 은 함유량 5%짜리 은화 2개를 만들 것이다. 그 자리에서 돈을 2배로 불릴 수 있는 방법이 아닌가. 그런데 다들 이렇게 생각한다면 은 함유량 10%짜리 은화는 시장에서 사라지고 5%짜리만 돌아다니게 된다. 이것이 바로 그 유명한 ‘악화(惡貨)가 양화(良貨)를 구축하는’ 과정이다. 실재료비가 서로 다른데 액면가는 같은 화폐가 동시에 유통이 된다면 재료비가 가장 낮은 화폐만 시장에 남고 나머지는 없어지기 마련이라는 얘기다.
중앙은행이 독점적으로 종이 화폐를 찍어내는 현대 경제에서는 악화가 양화를 구축하는 문제는 없어졌지만, 시뇨리지는 계속 남아있다. 물론 정부가 찍어낸 돈을 가지고 실물 재화나 서비스를 직접 구매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에 예전에 봉건영주가 시뇨리지를 누리던 방식 그대로 정부가 돈을 버는 것은 아니지만, 정부가 중앙은행에 빚을 지면서 재정지출을 늘리는 경우에는 현대 경제에서도 상당한 시뇨리지가 발생한다.
정부가 재정지출을 확대하고 싶은데 세수가 부족하면 중앙은행에서 직접 대출을 받거나 국채를 발행해서 중앙은행에 팔기도 한다. 그러면 이 과정에서 중앙은행이 새로 찍어낸 돈이 민간경제에 바로 풀려나가는 일이 생길 수 있다. 이런 상황을 밀턴 프리드먼이 헬리콥터에서 돈을 뿌리는 상황에 비유한 이후 거시경제학자들은 정부가 빚을 지면서 중앙은행이 돈을 찍어 민간에 공급하는 과정을 “헬리콥터 드랍”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현실 정책에서는 당연히 이런 식으로 하늘에서 지폐를 뿌리지는 않지만 (드라마 ‘종이의 집’에서는 비행선을 이용해 공중에서 돈을 뿌리는 장면이 나오기는 했다) 미국에서 글로벌 금융위기 때 전 국민에게 대규모 세금 환급을 해 준 것이 헬리콥터 드랍의 좋은 사례다.
그런데 정부가 빚을 지는 것 때문에 중앙은행이 계속 돈을 찍어내 시중에 풀면 통화량이 지나치게 늘어나고 결국 물가가 전반적으로 오르게 된다. 실제로 2008년 짐바브웨의 경우처럼 역사상 유명했던 하이퍼인플레이션의 배경에는 예외 없이 과도한 정부 지출과 이에 따른 과도한 화폐 발행이 있었다. 인플레이션이 발생하면 화폐가치가 떨어지면서, 소비자들이 갖고 있는 화폐의 실질 구매력이 낮아짐과 동시에 명목금액으로 표시된 정부부채의 실질가치도 낮아지게 된다. 따라서 인플레이션의 원인이 정부 지출 확대인 경우에는 결국 정부의 정책 때문에 국민의 소득과 자산이 줄어들면서 동시에 정부가 부채 부담을 덜게 되는 셈인데 이 현상을 ‘인플레이션세(稅)’라고 부르고 시뇨리지의 한 형태로 간주한다. 민간의 부와 소득이 정부로 이전되기 때문에 세금이나 마찬가지인 것이고, 그 원인이 정부의 정책에 따른 화폐 발행이기 때문에 시뇨리지라고 보는 것이다.
10원 동전 제조에 40원, 생산 중단 관심
종이로 만든 화폐는 이론적으로 그 자체의 가치가 0에 가깝다고 볼 수 있지만 현실에서 중앙은행이 화폐를 제조해서 발행하고 관리하는 데는 상당한 비용이 든다. 그래서 한국은행은 2022년 3월 화폐교환 기준을 변경했다. 한은 본부 발권국이나 지역본부에 가면 화폐를 깨끗한 것으로 교환해 주게 되어 있는데, 그전에는 창구에서 새로 찍어낸 신권을 달라고 하면 별말 없이 신권을 내줬었다. 그런데 2022년 3월 이후로는 원칙적으로 ‘사용화폐’, 그러니까 이미 시중에서 유통되다가 한국은행으로 돌아온 화폐 중 깨끗한 것을 다시 내준다. 신권은 한은 용어로 ‘제조화폐’라고 하는데, 그동안 제조화폐에 대한 수요가 과도해서 화폐 제조 비용이나 신권 교환 업무 관련 낭비가 많았다고 한다. 한은의 정책 변화와 함께, 빳빳한 새 돈을 세뱃돈이나 축의금으로 주고받으며 인사를 전하던 풍습도 점차 줄어들고 있는 듯하다.
종이돈에 비해 동전은 재료비가 더 많이 든다. 특히 최근 구리나 아연·니켈 등의 가격이 오르면서 재료비가 액면가보다 더 높아지는 일도 자주 벌어지고, 이런 ‘과도한 양화’들은 시장에서 사라지는 추세다. 미국에서는 지난 11월 1센트짜리 페니 동전의 생산을 중단했는데, 동전 하나당 생산비가 3.69센트에 달했다고 한다. 한국에서도 1원짜리와 5원짜리는 2006년 이후 거의 생산되지 않고 있고, 10원짜리의 경우에도 생산비가 40원에 달해 생산 중단 여부에 관심이 모아지고 있다. 오랜 세월 동안 인류의 역사와 함께해 온 금속화폐가 우리 주변에서 완전히 사라질 날도 멀지 않은 것 같다.

이태환 세종대 경제학과 교수. 서울대와 스탠퍼드대에서 공부하고 삼성경제연구소에서 한국경제의 다양한 측면을 연구했다. 주변의 사회문화 현상을 경제학으로 해석하고 이야기 나누는 것을 좋아한다. SERICEO에서 5년 간 ‘세상만사 경제학’ 강의를 맡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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