빈필이 변했다…165년 만에 정기공연 첫 여성지휘자 등장

2025-05-05

3일 오후 3시 30분 오스트리아 빈의 무지크페라인 공연장. 1842년 창단된 빈 필하모닉 오케스트라(빈필) 단원들이 무대에 섰다. 뒤이어 미르가 그라지니테-틸라(Mirga Gražinytė-Tyla)가 등장했다. 리투아니아 태생의 39세 지휘자다. 그는 이날 빈필 역사에서 처음으로 정기 공연에 선 여성 지휘자로 기록됐다.

그라지니테-틸라의 지휘는 명쾌하고 생동감 넘쳤다. 특히 같은 리투아니아 출신 작곡가인 라민타 셰르크슈니테의 ‘미드서머 송’을 첫 곡으로 소개하면서 지휘자의 정체성을 강하게 드러냈다. 세계적인 오케스트라 앞에서 보인 자신감이었다. 그라지니테-틸라는 각 악기의 소리를 입체적으로 살려냈다. 메인 프로그램인 시벨리우스 ‘레민카이넨 모음곡’에서도 선명한 표현으로 음악의 해상도가 높았다.

빈필이 창단 후 정기 공연을 열기 시작한 해는 1860년. 따라서 그라지니테-틸라는 165년 만의 첫 여성 지휘자다. 정기 공연은 빈필의 공연 중 정수다. 매해 9월부터 다음 해 6월까지 10번만 열린다. 정기 공연의 티켓을 구입하기 위해서는 매년 3~5월 서면으로 오케스트라에 신청서를 보내야 하며 개별 구매는 불가능하다. 빈필의 진성 청중을 위한 핵심 공연이다.

유럽 오케스트라 중에서도 보수적인 빈필이 여성 지휘자에게 열지 않았던 문이다. 빈필을 지휘한 첫 여성 지휘자는 호주 태생의 시모네 영. 2005년 당시 44세였던 영은 정기 공연이 아닌 빈 콘체르트하우스의 공연에서 지휘했다. 최근 여성 지휘자와 협업이 이어졌지만 본진인 빈 대신 잘츠부르크 페스티벌이 주요 무대였다. 요아나 말비츠가 2020년부터, 옥사나 리니우가 올해 2월 잘츠부르크에서 빈필을 지휘했다. 그라지니테-틸라도 빈필 데뷔를 지난해 여름 잘츠부르크에서 했다.

여성 지휘자, 또 여성 음악가에 대한 빈필의 변화는 가속화할까. 빈필의 대표인 다니엘 프로샤우어는 공연에 앞서 중앙일보와 인터뷰에서 “세계가 변화하고 있다. 빈필도 그 자연스러운 흐름에 함께 하는 것”이라고 했다. 또 “그라지니테-틸라와 특별한 관계이지만 일부러 여성 지휘자를 선택하는 일은 없다. 우리는 최고의 음악가를 선택한다”고 강조했다.

하지만 빈필의 변화는 꽤 의식적으로 보인다. 올 1월 빈필은 신년음악회 86년 역사상 최초로 여성 작곡가인 콘스탄체 가이거(1835~90)의 작품을 연주했다. 여성 단원도 늘어났다. 2011년 최초의 여성 악장으로 바이올리니스트 알베나 다나일로바를 선발한 후 현재 단원 148명 중 여성이 20여명이다. 1997년 이전에는 여성들에게 단원 오디션 기회가 없었던 오케스트라의 명백한 변화다. 프로샤우어는 “세상이 모두 바뀌고, 사람들의 기대 또한 바뀌었다”고 설명했다. 또 “내년 신년 음악회에서도 여성 작곡가의 음악을 포함시킬 것”이라고 귀띔했다.

한국의 여성 지휘자 이름도 인터뷰에서 거론됐다. 프로샤우어는 “한국의 재능 있는 수많은 음악가에서 깊은 인상을 받고 있다”며 현재 샌프란시스코 오페라의 음악감독인 김은선을 꼽았다. 그는 “김은선이 지휘한 오페라 ‘라보엠’을 봤다. 지휘하기가 아주 까다로운 곡인데 환상적으로 해냈다”며 “내가 주시하고 있는 지휘자이고, 그의 공연이 빈에서 열리면 당장 가서 볼 것”이라고 말했다.

세계적인 악단들의 여성 지휘자 데뷔는 하나의 추세다. 베를린필의 경우 올 2~3월에만 마린 알솝, 달리아 스타세프스카, 요아나 말비츠가 지휘대에 처음 올랐다. 김은선은 지난해 4월 베를린필 데뷔 공연을 열었다.

빈필은 상임 지휘자를 두지 않으며 단원들이 함께 연주할 지휘자들을 결정한다. 프로샤우어는 제1바이올린 수석으로 2017년부터 대표를 맡고 있다. 그는 “빈필의 정기 공연 지휘자 선정은 민주적이고 예술적인 과정을 거친다”며 “10명의 정기 공연 지휘자를 위해 20명의 후보를 두고 고민한다”고도 했다.

또 “빈필은 어느 정도 커리어를 가지고 있는 지휘자와 오래 관계를 만들어가는 것을 선호한다”고 덧붙였다. 다만 새로운 지휘자에 대한 요구도 강하다. 프로샤우어는 “우리와 가장 오래 관계를 맺었던 지휘자들 중 마리스 얀손스는 불행하게도 세상을 떠났고 주빈 메타는 89세로 건강이 좋지 않다. 새로운 세대의 지휘자 중 주목할만한 경력을 가진 이들이 필요하다”고 했다.

그라지니테-틸라는 빈필의 이러한 기준을 충족했다. 리투아니아 빌뉴스 태생으로 이탈리아 볼로냐, 독일 라이프치히, 스위스 취리히에서 지휘를 공부했다. 2016~2022년 버밍엄 시립 교향악단의 음악 감독을 맡으며 일약 스타로 떠올랐고, 프랑스ㆍ미국ㆍ독일ㆍ네덜란드의 명문 오케스트라를 지휘했다. 지휘자 구스타프 두다멜의 펠로우로 지휘 스타일을 확립했으며 바이올리니스트 기돈 크레머와 오래 협업하며 음악적 색깔을 분명히 했다. 2018년에는 음반사 도이치 그라모폰과 계약했는데 녹음한 작곡가들은 미에치슬라프 바인베르크, 셰르크슈니테, 엘가, 브리튼 등이다. 대중적이고 안전한 선곡에서 벗어나는 정체성 강한 지휘자다.

떠오르는 여성 지휘자들 명단에 들어있었던 그라지니테-틸라는 이번 빈필의 정기 공연 데뷔로 선두 주자에 끼게 됐다. 지휘는 정확했지만 무대 위에서는 특별히 겸손했다. 협연자였던 피아니스트 유자 왕의 앙코르 악보를 들고 나와 넘겨주는 역할을 자처했다. 또 연주 후 쏟아진 모든 박수를 오케스트라 단원들에게 하나하나 넘겨주는 제스처를 취하기도 했다.

공연 후 무대 뒤에서 만난 그라지니테-틸라는 기분이 어떻냐는 질문에 “그저 감사할 뿐”이라고 짧게 답했다. 빈필과 그라지니테-틸라의 정기 공연은 4일에도 한 번 더 열렸다. 빈필 정기 공연이 정식 파트너로의 인정이라면, 신년 음악회는 명예의 전당 헌액쯤 된다. 신년 음악회 지휘자는 단원들이 결정한다. 이제 빈필에서 여성 지휘자에게 공백으로 남은 마지막 지휘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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