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짝

2025-02-23

나는 옷에 배었던 먼지를 털었다.

이것으로 나는 말을 잘할 줄 모른다는 말을 한 셈이다.

작은 데 비해

청초하여서 손댈 데라고는 없이 가꾸어진 초가집 한 채는

<미숀>계, 사절단이었던 한 분이 아직 남아 있다는 반쯤 열린 대문짝이 보인 것이다.

그 옆으론 토실한 매한가지로 가꾸어 놓은 나직한 앵두나무 같은 나무들이 줄지어 들어가도 좋다는 맑았던 햇볕이 흐려졌다.

이로부터는 아무데구 갈 곳이란 없이 되었다는 흐렸던 햇볕이 다시 맑아지면서,

나는 몹시 구겨졌던 마음을 바루 잡노라고 뜰악이 한 번 더 들여다 보이었다.

그때 분명 반쯤 열렸던 대문짝.

김종삼(1921~1986)

김종삼 시인은 작게 말하고, 적게 말한다. 이 시는 이렇게 시작한다. “옷에 배었던 먼지”를 턴 후에 “이것으로 나는 말을 잘할 줄 모른다는 말을 한 셈”이라고. “먼지”와 “모른다”라는 말 사이에는 어떤 간극이 있을까. 시인은 옷에 묻은 먼지를 털고 작은 초가집 앞에 서 있다. 집이라는 공간에서 ‘문’은 경계를 나누고, 문의 안쪽과 문의 바깥쪽을 상상하게 한다. 활짝 열려 있기도 하고 꽉 닫혀 있기도 하다. 시인은 반쯤 열려 있으나 들어가지 못하는 문 앞에 서서 망설이는 마음, 구겨진 마음을 잘 펴기 위해 뜰 안쪽의 펼쳐진 햇볕을 들여다본다. 미션계의 “사절단이었던 한 분이 아직 남아 있다”는 그곳으로 들어가기 위해서는 어쨌든 대문을 통과해야만 한다. 그러나 시인은 들여다보기만 할 뿐, 발을 들여놓지는 않는다. 그곳은 불가침의 공간인가? 그때, 대문 밖에서 개미 소리만큼이나 작게 말하던 시인이 “분명 반쯤 열렸던 대문짝”이라고 단호하게 말한다. 그러나 문 안쪽과 바깥쪽은 시인의 현실처럼 반만 열린 세계, 다 열리지 못한 세계였다. 마음의 문짝들도 다 열지 못한 채 반쯤만 열어두었을 것이다. 우리들 마음의 문은 얼마큼이나 열려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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