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근 스페인 바르셀로나 일대를 돌아봤다. 14시간 비행기를 타고 갈 때는 이게 웬 고생인가 싶기도 했다. 그러나 활기 넘치는 스페인 경제를 보게 된 것은 의미 있는 경험이었다. 한국 경제를 더욱 객관적으로 보는 계기가 됐다. 국제통화기금(IMF)이 전망한 2030년 세계 국내총생산(GDP) 순위에서 한국은 현재 12위에서 15위로 내려앉는다. 스페인은 12위에 올라 한국에 앞선다. 스페인은 한때 아시아와 남미에 걸친 대제국을 건설했지만, 1898년 미국-스페인 전쟁을 분기점으로 쇠락하기 시작해 1936~39년 내전을 거치며 제국의 면모를 잃었다. 스페인 하면 금세 떠오르는 기업도 없다. 더구나 2010년엔 포르투갈·이탈리아·그리스와 함께 남유럽 재정 위기 국가(PIGS)로 전락했다.
한때 세계 9위 기록한 한국 GDP
역동성 떨어져 15위로 밀릴 위기
혁신 강화해 피크 코리아 막아야
당시 남유럽의 재정 위기는 한국엔 강 건너 불이었다. 세계 경제 순위에서도 한국은 2020년 9위까지 오르며 세계 8위 이탈리아까지 앞지를 것 같은 기세였다. 하지만 IMF의 전망에 따르면 한국은 순위가 계속 밀려난다. 최근 활력이 넘쳐 성장률을 3%까지 끌어올린 스페인 경제는 빠르면 올해 한국에 앞서 12위로 올라설 것이란 전망까지 나온다. 별 대단한 제조업이나 글로벌 기업도 없는 스페인은 경제 순위가 오르고, 한국은 자칭 10대 경제대국이라는 자부심은 어디로 가고 15위까지 밀려나게 되는 걸까.
‘피크 코리아’는 눈앞에 다가와 있다. 이미 충분히 알려진 대로 한국은 일본의 전철을 밟으면서 10위권 경제대국의 지위에서 멀어지고 있다. 일본은 2023년부터 독일에 세계 경제 3위 자리를 내주었다. 2010년 중국에 2위 자리를 내준 지 13년 만이다. 그렇게 된 원인은 저출산·고령화에 따른 역동성 저하와 함께 혁신의 위축에 있다.
일본은 경제가 쪼그라들자 가만있지는 않았다. 1990년 이후 ‘잃어버린 30년’ 동안 재정 확장과 금융 완화를 총동원했다. 아베 신조 총리의 3개의 화살 정책은 기존의 재정 확장과 금융 완화에다 구조 개혁을 얹어 경제를 살리는 정책이었다. 하지만 일본은 올해 인도에 4위 자리를 내주고 5위로 밀려날 것으로 관측되고 있다. 이런 결과는 무엇을 말하고 있나. 적자 재정을 늘리고 돈 풀어서는 경제를 살릴 수 없다는 사실이다. 일본엔 세계 경제를 주도하는 빅테크 기업이 단 한 개도 없다. 혁신이 없는 결과다.
한국도 처지가 다르지 않다. 메모리 반도체 기술은 앞섰지만, 초격차가 흔들리고 있다. 더구나 미국이 첨단 제조업 부흥에 나서면서 한국은 주요 산업 공동화와 함께 핵심 인력 이탈 우려가 커지고 있다. 그 필연적 결과는 저성장 기조의 고착화다. 이미 한국은 저성장 터널에 깊숙이 들어왔다. 박정희 정부 당시 10%에 달했던 성장률은 김대중·노무현 정부에서 4~5%대로 반토막 나고 문재인·윤석열 정부에선 1~2%대까지 내려왔다. 거의 제로 성장에 가까워져 전형적인 일본의 잃어버린 30년의 궤도를 밟고 있다.
이 궤도에서 벗어날 가망이 있을까. 일본의 사례를 보면 구조개혁이 저성장에서 벗어나는 유일한 비상구였는데 한국에선 그럴 조짐이 거의 보이지 않는다. 이명박 정부 무렵부터 위기감이 증폭되면서 규제 혁파에 나서라는 사이렌이 울렸지만, 정쟁에 빠진 국회는 되레 규제만 쏟아냈다. 해외에서는 가능한 100개 혁신 사업이 한국에서는 절반 넘게 제도와 규제에 막혀 불가능하고, 그런 구조가 전혀 바뀌지 않았다. 매킨지앤컴퍼니는 이런 한국을 ‘냄비 속 개구리’라고 지난 20년간 경고해왔지만 한국에선 전혀 메아리치지 않는다.
더 암울한 것은 구조 개혁은 고사하고 한국에만 있는 갈라파고스식 규제가 끝없이 양산되고 있다는 점이다. 코스피 5000을 위해 경영 투명성을 높여야 한다는 이유로 이사의 주주 보호책임을 강화하는 방향으로 거듭 ‘더 센 상법’이 만들어지고 있다. 노동조합의 쟁의 범위를 확대하는 노동조합법 개정도 군사작전처럼 추진되고 있다. 경기 부양이 필요한 국면에선 감세가 정석인데 여당과 정부는 내년부터 법인세를 또다시 올리기로 했다.
일본의 경우를 보면 재정 확장은 국가부채만 부풀릴 뿐 경제 체질 개선에는 별 영향을 미치지 못한다. 정부는 저성장 상황을 심각하게 보고 여기서 탈출할 정책에 힘써야 한다. 한국은 풍부한 관광·농업 자원으로 가만히 있어도 잘사는 남유럽과 다르다. 더구나 스페인·그리스 등도 최근 재정 개혁과 함께 구조 개혁으로 경제 활력이 살아나고 있다. 사람 빼면 아무런 자원도 없는 한국은 더 말해 무엇할까. 성장률 회복은 발등의 불이고 혁신만이 살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