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종두 울산예총 고문(시인, 소설가)의 1980년 삼청교육대 수난기(受難記)를 연재한다. 울산MBC 기자였던 최종두 고문은 1980년 경기도 포천에 있는 군부대에 끌려가 필설로 다할 수 없는 고초를 겪었다. 연재 글에는 인권을 짓밟는 ‘삼청교육’의 참상이 생생히 그려져 있고, 1970~80년대 울산의 정치, 경제, 언론, 문화계 비사(祕史)도 엿볼 수 있다. 최 고문은 “1980년대는 찬탈한 정권을 유지하기 위해 국민들에게 영혼을 뭉개버리는 무자비한 고문을 가하고, 전주 같은 목봉을 힘겹게 들게 하면서 서막을 열었다”며 “몽둥이와 총으로 지레 겁을 주며 정권을 유지할 수 있는가를 실험한 것이 제5공화국의 주구들”이라고 술회했다. <편집자 주>
아내는 처제와 함께 그사이 가발 전문점에서 사 온 가발을 나에게 덮어씌웠다. 거울을 보았더니 몰라볼 정도로 가발을 쓴 모습이 자연스러웠다. 아내는 가끔씩 깜짝 놀라게 한다. 서울에서 꼭 만나볼 사람을 미리 예상하고 준비해 왔던 것이다. 그동안 나를 구해내느라 머리를 맞대고 거의 매일 대책회의를 가졌다는 친구들이었다. 그중의 한 친구를 불러냈더니 그가 말했다.
“김 대령이 국보위에 알아보았는데 회사에 잘 다니고 있을 거라고 말하더라”는 것이었다. “그 위에 중역 둘은 들어냈는데 무슨 소리를 하느냐면서 핀잔을 들었다”는 것이었다. 나의 머릿속으로 스쳐가는 기억이 되살아났다. 그 기억을 떠올린 다음 내가 내릴 수 있는 결론은 나는 그 생지옥의 교육장을 가지 않아도 될 일을 제 발로 걸어가 죽을 고생을 하고 온 것이었다.
그렇다. 그렇게 결론을 내릴 수밖에 없는 것이다. 내 친구가 김 대령을 만나보았더니 나무라듯 했다는 말과 울산경찰서 연무장에서 교육 심사를 받던 날 심사위원장이 하던 말을 종합해 보면 해답이 나오는 결론이었다. 그러나 이미 쏟아져버린 물이 된 사실을 어떻게 할 것인가? 하는 생각과 함께 나에게 밀어닥친 자책감이 무척 가슴을 아프게 하는 것이었다.
그 심사장에서의 분위기에 질려버린 내가 끝내 변명이 아니면서도 한마디도 하지 않았던 것이 나의 불찰이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자리에서 보안대의 그 중사는 해고된 자가 왜 회사에 나오지? 하고 싸늘한 반말로 물었고 심사위원장인 신 중령은 그럼 누구의 지시를 받는 건가요? 하고 물었다. 어쩌면 심사위원장은 나를 유리한 쪽으로 유도하기 위해서 그렇게 물었는 건지 모를 일이었다.
나는 처음 회사의 자체 인사이동의 결과에 따라서 해직되었다. 해직 통보를 받고 사장님을 만났다. 사장님은 해직 사유를 죄다 말해주었다. 경찰서장이 이름을 찍어서 해직시키는 것이 좋을 것이라고 은근히 협박 같은 여운을 남긴 것과 지역보안대가 해직 대상자로 뽑는다는 이유였다.
그러나 사장님은 그런 사유가 있다고 하더라도 국보위에서만 구제해도 좋다는 지시만 있다면 복직시켜도 된다고 하시면서 어디를 통하든 한번 알아보라고 하였다. 나는 그 길로 김 대령을 염두에 두고 서울로 갔다. 서울에서 하루를 지내고 돌아와서는 곧 탐석 길에 나서 며칠 지나고 왔다. 그런데 필시 애를 태우고 있으려니 했던 아내가 대문을 들어서는 나에게 활짝 밝은 표정으로 회사에서 집에 오는 대로 출근하라는 연락이 왔다고 했다.
전무와 상무 그리고 나, 셋이서 앉은 자리에서 상무가 말했다. “국보위에서 최 부장은 그대로 있고, 대신 모든 중역들은 회사는 떠나라는 지시가 있었다”고 했다. 그 지시에 따라서 그 회사의 중역들은 회사를 떠났고 회사는 국가에 헌납이 되었다.
그때 국가를 통치하는 곳은 국보위였다. 그러기 때문에 그 지시에 따라 회사의 주인이 바뀌지 않았는가? 나는 심사위원장이 그럼 누구의 지시를 받는가요? 라고 물었을 때 보안대의 그 중사가 위원장에게 대들며 그런 것을 왜 묻는 거요? 하면서 삿대질하던 광경을 똑똑히 기억하고 있다. 그때 왜 내가 그 중사에게 질문하지 못했을까? 해직 결정을 한 회사의 인사위원은 이미 효력을 국보위 지시에 의해 상실한 것은 아닌가?
회사가 통째로 헌납되고 난 다음의 회사 주인과 대주주는 국가 즉, 국보위가 아닌가? 그렇다면 국보위가 나의 복직을 지시하고 중역들을 물러나게 한 것은 회사의 주인 곧 국가의 방침일 것이다. 그리고 나의 친구 김 대령은 원칙이나 명분이 없는 일에는 한 발자국도 나서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런 그였기에 육군의 주요 요직을 맡게 되지 않았을까? 또 그의 사관학교 동기생이나 선후배 다수가 군의 중요 요직에 포진되어 있는 것도 알고 있었다. 또 그런 명분으로 필시 나를 구하려 들었던 것이라는 생각을 해보았다.
그러고 보면 내게 남아 있는 문제점이 없는 것도 아니었다. 보안대의 그 중사가 회사를 국보위에 넘겨주고 난 다음 처음으로 회사에 들렀을 때는 모든 중역들이 그를 상전 모시듯 했다. 그런 다음 다시 HR의 은닉재산을 찾아내기 위해 거의 매일 출근하다시피 와 있었고, 회사의 전무실이 그의 전용 사무실이 된 것처럼 전무와 같이 지내게 되었다. 그러다 보니 허물없이 지내는 사이가 되었다. 깍듯이 존댓말을 하면서 대하던 모습은 찾아볼 수 없게 되었고, 점심과 저녁, 술자리를 자주 하게 되었다. 사우나를 늘 같이 다니면서 주말에도 어울리게 되었다.
그러자 서울로부터 낯선 사람 한 분이 다녀갔다. 사장님의 낌새로 보아 서울에서 온 사람은 HR이 보낸 사람 같아 보였다. 그 후 나의 짐작이 맞아떨어졌음을 사장님을 통해 알게 되었다. 사장님이 전무와 상무를 불러 은밀한 지시를 하게 된 것이다. 은밀한 지시란, 경비에는 구애받지 말고 조사하러 나오는 보안대의 그를 우리 쪽 사람으로 만들라는 것이었다.
그는 그 후 HR의 은닉재산을 찾기 위해 울주군 일대를 돌아다니면서 회사에는 처음보다 훨씬 덜 나타나는 것이었다. 소문이 파다하게 드러나 있는 부동산에 대해서만 조사를 하고 아예 깊이 숨겨놓은 재산은 그냥 넘겨버린다는 입소문도 생겼다. 입이 벌어지는 어마어마한 동그라미가 건네졌다는 소문도 들리고 있었다. 그러다 보니 전무와는 오래 사귄 친구 이상으로 서로가 욕을 섞어가며 말을 나누는 광경도 보게 되었다. 물론 사장님이 부르게 되면 살가운 강아지처럼 구는 것이었다.
나는 짐작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런 사실을 알아낸들 무얼 할 것이며 또 어떻게 할 것인가? 내가 이미 앓은 병이 아닌가? 그 병을 이 만치에서 털고 일어날 수 있었다는 게 불행 중 다행이란 생각이었다. 문득 매월당 김시습의 시 한 수가 떠올랐다.
갰다 흐렸다 다시 개이니/ 천도(天道) 이러한데 하물며 세정(世情)이야/ 날 칭찬하더니/ 문득 날 헐뜯고/ 명예 물리치더니/ 도리어 구하네// 꽃이 피건 지건 봄이 어찌 상관하며/ 구름이 가건 오건 산이 어찌 다투리/ 세상에 이르노니 모름지기 기억하라/ 즐거움 얻어도 평생 갖기 어렵느니
나는 한없이 설레는 마음으로 꿈에서만 뵈었던 어머니를 만날 생각을 하면서 왜 이렇듯 유유자적한 매월당의 시가 생각나는지 모를 일이었다. 울적하면서 괴롭기도 한 이런 마음을 가져 보이기는 난생처음인 것 같았다. 권력의 굴곡과 인생의 무상을 체험한, 한(恨)의 선객(禪客) 매월당의 심기를 들여다볼 수 있는 이 시 한 구절처럼 나는 살 수 없을까.
내가 살아온 지난날이 원망스럽기만 했다. 세상은 내 앞에서 자지러지게 웃으며 칭찬하다가도 어느 한순간 사소한 일 때문에 금방 헐뜯기도 한다. 즐거움과 지위가 무엇인가? 그것을 얻어도 평생 가지기 어려운데 왜 그것을 악을 쓰며 구하려 하는 것일까?
이제 내가 살아가는 방법부터 바꾸어야겠다고 생각해 보았다. 그러나 내가 그렇게 살고 싶어 한다고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것이 아닌 세상살이다. 그토록 미운털이 배겼던 내가 정 사장의 보호 때문에 그래도 겨우 회사에 붙어 있을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모두가 청진동의 식당에서 HR과 점심을 하게 되었을 때, 정 사장에게 HR이 나를 잘 데리고 있으라던 그 한마디가 요지부동이 아니면 어명(御命)으로 받들어야 할 사장님의 의무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게 아니었다면 목이 열 개라도 모자랐을 것이다. 그렇지만 그 모든 것들이 HR의 측근이라고 자처하며 고향에서 부당한 방법으로 이권과 바르지 못한 일들에 개입한 것을 알면서 그냥 눈감아 버리지 못하고 사회에 고발해버리려 했던, 나의 정의감을 앞세운 고발정신 때문이었다.
최종두 시인,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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