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미국에 대한 대규모 투자 사실을 전혀 몰랐어요. 국내 고용에 큰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사항인데 사측은 노조를 패싱했습니다.” 현대차 노조의 한 관계자는 최근 현대차그룹이 미국에 4년간 총 31조 원의 투자 계획을 발표하자 이같이 말했다.
노조의 공식 입장은 아니라고 단서를 달았지만 그의 발언에서 현대차 노조의 주된 관심사가 무엇인지 파악할 수 있었다. 대내외 경영 환경이 어떻게 바뀌든 노조의 허락 없이 변화에 대응해서는 안 되고 특히 노조는 손해를 보지는 않겠다는 것이다. 노사 간 상생이 아닌 노조 영향력만 유지하고 보자는 ‘노조 이기주의’에 다름 아니다.
현대차 노조는 현재 공장별 생산량과 인원 배치는 물론 라인별 생산량에도 깊숙이 개입하며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다. 도요타나 포드 등 글로벌 경쟁사들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기이한 구조다. 과거 노사 간 분쟁이 남긴 상처의 결과물일 수 있지만 급변하는 글로벌 경영 환경에서는 현대차 경쟁력에 족쇄가 되고 있음은 자명하다.
노조 중심주의는 도널드 트럼프 미 대통령의 관세 폭격이 현실화하면서 현대차를 더욱 옥죄고 있다. 지난해 사상 최대 실적과는 별개로 미국의 고율 관세 대응에 실패하면 현대차그룹의 중장기 성장은 기약할 수 없다. 자율주행 등 미래 기술 경쟁 역시 녹록지 않은 현실이다. 현대차는 수억 ㎞ 이상의 자율주행 데이터를 축적한 테슬라나 정부의 전폭적 지원을 받는 중국 비야디(BYD)나 바이두 등에 뒤처져 있다.
회사의 생존과 성장이 일자리의 양과 질을 결정함은 두말할 필요가 없다. 기아 화성지부는 현대차그룹의 미국 투자 발표 후 배터리 생산공장 건설을 요구하며 국내 투자 확대를 촉구했다. 금속노조 기아지부와 현대차 노조 역시 국내 투자를 쟁취하는 것이 핵심 목표라고 한다. 현대차그룹이 지난해보다 19% 늘어난 24조 3000억 원을 올해 국내에 투자하겠다고 밝혔고 어려워도 국내 생산량을 유지하겠다고 했지만, 추가 요구 사항만 내놓으며 회사를 압박하고 있다. 지금 어느 때보다 절실한 것은 투쟁이 아닌 대화와 상생의 노사 관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