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동산 공화국에서 AI시대 첨단 제조국으로

2025-02-11

1990년대 후반 ‘IMF 외환위기’ 이후 정부는 내수경기 활성화를 위해 신용카드 사용 활성화 정책을 추진했다. 이는 인위적 경기부양의 한 형태로, 가계부채를 늘려 소비를 촉진하는 방식이었다. 월 70만원이던 현금대출 한도가 폐지되고, 신용카드 사용액에 대한 소득공제제도가 도입되었다. 신용카드 이용실적은 1998년 63.5조원에서 2002년 622.9조원으로, 현금대출은 32.7조원에서 357.7조원으로 4년 만에 약 10배로 증가했다.

신용카드와 가계대출을 통한 내수 진작으로 2002년 7%대의 높은 경제성장률을 기록했다. 그러나 과도한 대출은 신용불량자 급증이라는 심각한 부작용을 초래했고, 2003년 한국경제는 극심한 내수부진에 빠지며 성장률이 3.1%로 하락했다. 2004년 4월 경제활동인구 여섯명 중 한명인 382만명 이상이 신용불량자가 되었다. 영국의 이코노미스트지는 이 현상을 ‘한국의 플라스틱(신용카드) 버블’이라 불렀다. 지속 가능하지 않은 부채는 내수침체를 필연적으로 동반한다는 것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례이다.

외환위기 이후 벌어진 카드대란

부채 통한 경기부양 부작용 사례

손쉬운 건설투자 해법 의존 그만

AI 기반의 산업구조 재편이 호기

2003년 2월, 김진표 경제부총리는 취임 기자회견에서 “인위적 경기부양책은 부동산 투기, 가계부채 증가 등의 부작용을 야기할 수 있어 지양하고, 재정의 조기 집행에 중점을 두겠다”고 밝혔다. 2003년 4월 노무현 대통령은 첫 국회 국정연설에서 “우리가 빠지기 쉬운 유혹이 무리한 경기부양정책이다. 무리하게 돈 풀고, 부동산 부양정책 쓰는 것이다”라고 밝히며, 추경이나 SOC 투자에도 보수적 입장을 유지하겠다고 강조했다.

“부동산 경기를 진작하면 건설업이 살아나고 경제가 활성화된다는 논리를 펼친다. 현재의 부동산 경기침체는 시장적인 과정이다. 그럼에도 건설업을 살리기 위해 부동산 규제를 완화하자는 것은 일시적인 금단현상을 겁내기 때문이다. 이는 알코올 중독자에게 술을 주어서 당분간 정상생활을 하자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2004년 8월 국민경제자문회의에서 나온 발언이다.

우리는 지난 20여년간 산업구조 혁신 대신 가계부채 확대를 통한 부동산 경기부양과 건설·SOC 투자라는 손쉬운 해법에 주로 의존해왔다. 예를 들어 남한의 크기는 미국 텍사스주의 6분의 1 정도인데 인천, 김포, 김해, 제주, 청주, 대구, 무안, 양양 총 8곳에 국제공항이 있다. 면적비율대로라면 텍사스에 48개의 국제공항이 존재해야 하는데, 텍사스주에는 4개의 국제공항만 있다. 국제공항은 지방SOC 과잉투자를 보여주는 아주 작은 예이다.

그동안 손쉬운 해법으로 대응해온 결과, 우리가 현재 물려받은 유산은 다음 두 가지로 요약할 수 있다. 첫째, 부동산 시장의 왜곡이다. 이는 세계 최고 수준의 서울아파트 PIR(소득 대비 주택가격비율), 세계 최고 수준의 가처분소득 대비 가계부채비율, 지방 미분양 아파트의 누적으로 확인할 수 있다. 둘째, 양질의 일자리 부족이다. 이는 초·중·고의 과도한 사교육비, 30%가 넘는 수능 N수생 비중, 의대 쏠림 현상, 늦어지는 첫 취업 연령과 이로 인한 출산율 저하, 생계형 자영업의 과잉 공급, 수도권으로의 인구집중 가속화, 양극화 심화라는 복합적 사회문제를 초래하고 있다. 이 두 가지 유산이 빚어낸 더 근본적인 문제는 사회 전반의 투기심리 만연, 정직한 노동의 가치 하락, 그리고 이로 인한 사회 갈등의 심화와 극단적 이념의 확산이다.

다행스러운 것은 우리가 나아갈 길이 분명하다는 점이다. 첫째, 가계대출을 원칙대로 철저히 관리한다. 지방 아파트라고 예외를 두어선 안 된다. 둘째, 정부는 첨단산업의 글로벌경쟁력 확보를 위한 제도와 환경 조성에 주력한다. 양질의 일자리는 민간기업이 창출하기 때문이다. 평당 2억짜리 아파트에 관심이 쏠린 사회와 연봉 2억의 첨단산업 일자리에 주목하는 사회의 미래 경로는 다를 수밖에 없다.

타이밍도 좋다. 모든 산업구조가 AI기술을 기반으로 재편하는 변곡점에 진입했다는 것이 전문가들의 평가다. 이런 상황은 “로보틱스의 챗GPT 모멘트가 왔다”라고 한 엔비디아 CEO 젠슨 황의 CES 기조연설에서 실감할 수 있다. 마트에서 파는 1000원짜리 LED전구에도 반도체가 들어있는 것처럼, AI기술이 확산하면 거의 모든 제품과 서비스에 AI가 탑재되리라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칩워』의 저자 크리스 밀러 터프츠대학 교수는 AI가 국가권력 유지의 핵심요소가 될 것이라고 말한다. 차세대 군사시스템과 국가안보를 위한 정보분석 활동이 AI기술에 좌우될 것이기 때문이다.

한국은 반도체, 자동차, 조선, 디스플레이, 로봇, 방위산업이라는 테크 제조업 포트폴리오를 종합적으로 확보한 유일한 미국의 동맹국이라는 점에서 기회가 있다. AI가 탑재된 제품의 경우 동맹국을 선호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산업 패러다임과 글로벌 밸류체인이 동시에 움직이는 이 결정적 순간에 반드시 대체 불가능한 지위를 확보해야 한다. 365일 밤을 새워도 시간이 모자란다.

박선영 동국대 경제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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