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머니의 메밀묵, 아들의 손끝에서 세상에 없던 요리로 [쿠킹]

2025-09-02

한 끼 식사를 위해서 몇 달을 기다려본 경험이 있으신가요. 한 식당을 예약하기 위해 800통이 넘는 전화를 걸고, 10개월이 넘는 오랜 기다림의 시간을 보내기도 하는, 누구보다 먹고 마시는 것에 진심인 푸드 콘텐트 에디터 김성현의 〈Find 다이닝〉을 시작합니다. 혀끝까지 행복하게 만드는 다이닝을 찾는(Find), 그가 추천하는 괜찮은(Fine) 식당을 소개할게요. 읽기만 해도 배가 부를 정도로 생생하고 맛있게 쓰여진 맛집을 만나보세요.

김성현의 Find 다이닝 31.소바쥬

STORY

모든 이야기에는 시작이 있다. 2024년 3월 문을 연 레스토랑 소바쥬의 이야기는 오래된 시장 한켠에서 메밀묵을 팔던 어머니의 작은 카트에서 출발한다. 홀로 두 아들을 키워야 했던 어머니의 삶이 담겨 있던 메밀묵은 어린 아들에게 세상 가장 배부르고 맛있는 기억으로 남았다. 소년은 대장을 절제해 음식을 잘 드시지 못하던 어머니께 꼭 맛있는 음식을 해드리고 싶다는 꿈을 품고 자라 요리사가 되었다. 그 주인공은 박주성(26) 셰프다.

조리과에 진학한 그는 이탈리안 레스토랑에서 첫 요리를 시작했고, 이후 이자카야 붐이 한창이던 시절에는 일식의 매력에 빠져 7년간 자신을 단련했다. 그 과정에서 재료를 다루는 법을 익히며 “요리에는 100가지 방법이 있다면 100가지 모두 정답”이라는 가르침을 얻었다. 본격적으로 자신의 길을 모색하면서도 방향만큼은 분명했다. 정해진 틀을 따르기보다는, 심장을 뛰게 하는 음식을 하고 싶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는 가장 깊은 기억 속의 어머니의 메밀을 떠올렸다. 이것이 소바쥬의 시작이었다.

메밀이라는 재료를 앞세운 소바쥬의 차별성은 바로 ‘규정되지 않음’에 있다. 박 셰프는 자신의 요리를 “일식도, 양식도, 한식도 아니다”라고 말한다. 어느 한 장르에 갇히는 순간 메밀이라는 주제를 풀어내는 데 한계가 생긴다고 믿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는 세계 곳곳을 다니며 공부한다. 프랑스 사람들이 즐기는 갈레트에서 어머니의 메밀전병을 떠올리며 메뉴를 개발하고, 러시아의 블리니 팬케이크를 연구하며, 이탈리아의 메밀 파스타 ‘피초케리’를 가볍고 깔끔한 스타일로 재해석했다. 참고할 레시피가 없기에, 코스의 흐름마저 오직 자신의 경험을 바탕으로 새롭게 쌓아 올린다.

그의 집념은 메뉴 교체 주기에서도 드러난다. 메뉴를 바꾼 지 일주일밖에 되지 않았더라도 더 좋은 제철 식재료가 눈에 띄거나 새로운 아이디어가 떠오르면 망설임 없이 새 메뉴를 선보인다. ‘세상에 단 하나뿐인 요리’란 완성된 결과물이 아니라, 완벽을 향해 나아가는 끊임없는 과정 그 자체이기 때문이다. 그는 또 ‘비싸고 어려운 오마카세’라는 편견을 넘어, 누구나 편안히 들를 수 있는 소박한 동네 식당처럼 따뜻한 경험을 전하고 싶다고 말한다. 아들의 요리를 맛본 어머니가 대견함에 웃다가 뒤돌아 눈물을 훔치는 것처럼, 소바쥬의 음식은 건강하고 진실한 언어로 이곳을 찾는 이들의 마음을 어루만진다.

EAT

소바쥬의 모든 요리는 일본에서 ‘삼타테(三たて)’라 불리는 원칙, 즉 ‘갓 제분한 가루, 갓 반죽해 썰어낸 면, 갓 삶은 면’을 지키는 것에서 시작된다. 셰프는 매일 필요한 만큼의 메밀을 직접 제분하는데, 이때 껍질 쪽 가루를 많이 섞어 곡향을 풍부하게 살린다. 껍질이 많으면 면이 쉽게 끊어지지만, 그는 수분 양을 정교하게 조절하고 반죽을 오래 치대어 쫀득한 식감과 진한 향을 동시에 잡았다.

이곳의 시그니처 메뉴는 메밀 도후와 넙적 메밀면이다. 박 셰프는 “메밀 본연의 매력을 가장 잘 보여주는 두 요리”라고 말한다. 메밀 도후는 면보다 굵게 간 메밀가루에 물과 칡 전분을 섞어 20분간 냄비에서 치댄 뒤 차갑게 굳혀 만든다. 그는 이 묵의 녹진한 질감이 마치 ‘우니(성게소)’ 같다고 생각해 신선한 회와 함께 낸다. 여기에 들기름과 감식초, 재래식 된장으로 만든 비네그레트 소스를 곁들이고, 볶은 메밀을 올려 바삭한 식감을 더한다.

넙적 메밀면은 코스 내내 같은 면을 먹으면 지루할 수 있다는 생각에서 비롯됐다. 최대한 얇게 민 반죽을 넓게 잘라 단 30초만 삶아 메밀 향을 보존했다. 처음에는 일반 면처럼 냈지만, 지금은 포크와 나이프로 썰어 먹는 방식으로 바꿔 라자냐 같은 새로운 경험을 선사한다.

코스는 전반적으로 메밀을 주제로 한 창작 요리들로 채워진다. 최근 선보인 러시아식 팬케이크 ‘블리니’ 역시 메밀의 새로운 변주다. 얇게 부친 메밀 팬케이크 속에는 무엇이 들어있는지 알 수 없다가, 나이프로 가르면 크리미한 스트라차텔라 치즈, 얼그레이 향을 머금은 복숭아, 짭조름한 하몽과 향긋한 바질이 모습을 드러낸다. 마치 잘 차려진 브런치를 맛보는 듯한 이 한 접시는 “여기가 양식당인가?” 하는 즐거운 착각을 불러일으킨다. 셰프는 러시아 음식이라는 정체성을 존중해 억지로 동양적인 포인트를 더하지 않았고, 마지막에 뿌리는 소금의 짭짤함이 각 재료의 맛을 선명하게 엮어내는 '킥'이 된다.

이외에도 이탈리아의 메밀 파스타 '피초케리'에서 영감을 얻어 동백 오일과 염장 다시마로 재해석한 파스타를 선보이기도 하고, 호두를 갈아 만든 고소한 '호두 밀크'에 파스타 면을 말아 콩국수처럼 내기도 한다. 여름에는 한국 토종 '앉은뱅이 밀'만으로 뽑아낸 우동면을 선보이는데, 여기서는 밀가루 자체의 짙은 향을 느낄 수 있다.

식사의 마지막을 장식하는 아이스크림마저 개성이 강하다. 박 셰프는 흔히 차로 끓여 마시는 '쓴메밀'을 볶아 우유와 생크림에 천천히 우려내 아이스크림을 만든다. 쓴메밀 특유의 깊고 구수한 풍미가 달콤한 아이스크림에 녹아들어, 마지막 한입까지 메밀의 무한한 가능성을 증명하며 긴 여운을 남긴다. "메밀이 이렇게 맛있는지 몰랐어요". 손님들의 이러한 반응이 가장 기억에 남는다는 박 셰프. 그의 바람처럼 소바쥬는 익숙했던 메밀을 통해 전혀 새로운 미식의 경험을 선사하고 있다.

김성현 푸드 콘텐트 에디터 cooking@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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