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윤석열 대통령이 유력한 대선후보로 운위되던 시절 그와 단둘이 식사를 한 적이 있다. 그 자리에서 우리는 난데없이 ‘카를 슈미트’에 관한 얘기를 나눴다. 미학을 전공한 자가 쓴 칼럼에 법학자의 이름이 등장한 게 신기했던 모양이다.
그 칼럼에 나는 ‘민주당 정치인들의 법관념이 자유주의와는 거리가 멀고 카를 슈미트를 연상시킨다’고 쓴 바 있다. 그 말이 그의 관심을 끈 모양이다. 아무튼 그 자리에서 우리는 이 나치 법학자에 대해 비판적 입장을 공유했던 걸로 기억한다.
심지어 그는 법학의 문외한인 내게 카를 슈미트의 헌법관을 ‘결단주의’라 부른다며, 우리나라에서도 이 법관념을 다른 것으로 대체한 분이 계신다고 가르쳐 주기까지 했다. 그 자리에서 들은 것이 하필 헌법학자 허영 교수의 이름.
“비상계엄은 비상대권 발동” 주장
대통령 권한이 헌법 바깥에 있나
나치 법학자 카를 슈미트와 상통
헌정 수호 위해 파괴한다는 모순
그런데 최근 언론을 통해 접하는 윤 대통령과 허 교수의 발언이 그때 그 자리에서 들었던 것과는 너무 혹은 사뭇 달라 당황스럽다. 두 분의 생각이 그새 달라진 것일까? 아니면 내가 무지해서 그의 말귀를 잘못 알아들은 것일까?
아무튼 검찰의 공소장에 따르면 윤 대통령은 이미 작년 총선이 끝난 3월부터 ‘비상대권’을 얘기하기 시작했다고 한다. 4월에는 주위에 “비상대권을 통해 (정국을) 헤쳐나가는 것밖에는 방법이 없다”고 말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허영 교수 역시 대통령의 ‘비상대권’이 헌법에 규정된 권한의 정당한 행사라고 주장한다. “비상계엄 선포권은 헌법이 규정한 대통령의 비상대권 중 하나인 만큼, 지금이 비상사태인지를 판단할 권한은 오로지 대통령에게 있다.”
국가비상사태에 계엄의 발동은 당연한 일. 문제는 ‘국가비상사태’가 언제인지 ‘누가’ 정하느냐다. 허 교수는 그 권한이 “오로지 대통령에게 있다”고 본다. 이게 ‘주권은 비상사태를 결정하는 자에게 있다’는 카를 슈미트의 관념과 뭐가 다를까?
대다수의 국민은 12월 3일의 상황을 국가비상사태로 보지 않았다. 대한민국 헌법 1조는 ‘대한민국의 주권은 국민에게서 나온다’고 규정한다. 그렇다면 도대체 ‘언제’가 비상사태인지 결정할 권한도 당연히 국민에게 있어야 하지 않겠는가.
헌법에 비상계엄의 요건을 박아 놓고 의회의 동의를 거치게 한 것은 그 때문일 게다. 하지만 허영 교수는 말한다. “설령 국민의 눈높이와 다르더라도 대의민주주의에 따라 국민 주권을 부여받은 대통령은 독자적으로 판단하되 양심에 따라 책임을 져야 한다.”
결국 대통령으로 선출된 이는 국민 주권을 부여받았으니 그의 독자적 판단을 곧 국민의 판단으로 봐야 한다는 얘기다. 그렇다면 박정희가 시도 때도 없이 내린 긴급조치들도 다 국민의 판단으로 간주해야 한단 말인가?
수학체계의 토대를 이루는 공리가 증명 없이 참으로 통하듯 법의 영역에서는 ‘지도자의 결단’이 공리와 같은 역할을 한다, 즉 수학의 공리가 증명의 의무에서 자유롭듯이 지도자의 결단은 사법적 심사에 구속되지 않는다는 얘기다.
‘양심에 따라 져야 한다’는 그 ‘책임’은 사법적 책임이 아니라, 아마도 ‘역사 앞에서의 책임’, 뭐 이런 것일 게다. 대통령의 옹호자들은 이렇게 대통령의 비상대권을 헌법의 ‘바깥’에 놓는다. 이게 카를 슈미트의 관념과 뭐가 다른가?
헌법의 조문을 만드는 것은 법률가의 일이겠지만, 사실 헌법을 ‘정초’ 내지 ‘발동’시키는 것은 법률적 활동이 아니라 혁명이나 쿠데타와 같은 정치적 폭력. 그래서 비상대권이 법의 바깥에 있는 권한이라고들 생각하는 게 아닐까.
가령 “성공한 쿠데타는 처벌할 수 없다”던 유명한(?) 판결에도 그런 생각이 깔려 있을 게다. 어쨌든 그날 그 자리에서 그에게서 허 교수를 이 결단주의 헌법관의 대안을 제시한 이로 소개받았는데, 지금 두 분은 나를 당혹하게 만든다.
그 식사 자리의 자유주의자가 느닷없이 비상계엄을 때리고는 비상대권의 초법적 지위를 강변한다. 29번의 탄핵과 무수한 특검의 공세로 국정의 발목을 잡는 상황이 아무 ‘결정’(결단)도 내리지 못하는 바이마르 공화국의 상황으로 비친 모양이다.
거기에 선관위 개표조작설과 중국정부 개입론 등 유튜브에 횡행하는 음모론이 합쳐져, ‘지금 국가가 내우외환의 위기에 처해 대통령인 자신이 비상한 결단으로 헌정의 수호자로 나서야 한다’는 망상에 빠져버린 것일 게다.
이 또한 새로운 것은 아니어서 과거 군부 독재자들이 전가의 보도처럼 휘두르던 논리의 반복이라는 것을 온 국민이 안다. 그래서일까? 대통령의 옹호자들도 최근 탄핵의 ‘기각’에서 서서히 ‘각하’를 주장하는 쪽으로 방향을 틀고 있다.
슈미트의 논리를 원용해 비상계엄을 변명하는 이들이 정작 탄핵을 ‘각하’하라고 헌재를 압박하는 대목에서는 철저한 법실증주의자의 면모를 과시한다. 이 또한 헌정을 수호하기 위해 헌정을 파괴한다는 대통령의 자가당착 못지않게 인상적이다.
진중권 광운대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