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5년 전 돌아가신 아버지 묘를 이장(移葬)했다. 당시 정신없이 구했던 묘지는 경기도 모 공원묘지에서도 거의 산꼭대기 자리였다. 지금도 기억이 생생한 장례식 풍경. 사람들이 무거운 관을 낑낑대며 운반했고, 어린 동생들은 눈 쌓인 산에서 계속 미끄러지면서 울었다. 지금은 접근성이 좋아졌다지만, 노쇠한 어머니에게 그곳은 어느 날부터 갈 수 없는 장소가 되었다. 1년 전 어머니가 돌아가셨을 때 우리는 집 근처에 평장묘를 마련했고, 이번에 그곳으로 아버지를 이장한 것이다.
그런데 부모 묘와 관련된 이 같은 고민이 나만의 것은 아닌 것 같다. 선산에 부모를 모신 친구는 성묘 한 번 다녀오려면 하루가 꼬박 걸린다며, 언젠가 이장하고 싶어도 어디까지 모셔와야 할지 엄두가 안 난다고 했다. 또 다른 친구는 조부모 묘가 고향 뒷산에 있는데, 이제 그곳엔 아무도 살지 않아 다음 세대가 돌볼 수 있을지 걱정이라고 했다. 우리는 부모를 돌보는 마지막 세대이자, 자녀에게 돌봄을 기대하기 어려운 첫 세대라는 뜻에서 ‘마처세대’라 불린다. 어쩌면 이 말은 살아 있는 부모뿐 아니라, 돌아가신 부모의 무덤 돌봄에도 해당하는 이야기일지도 모르겠다. 무덤의 미래는 어찌 될까?
서울서 태어난 나는 어릴 때, 사람이 죽으면 다 ‘망우리 공동묘지’에 묻히는 줄 알았다. 그곳이 식민지 시대 경성 시민의 죽음을 수용하기 위해 만들어진 공영묘지였다는 것은 나중에 알았다. 근대화 과정에서 죽음의 사회적 관리가 시작된 것이었다. 이후 1960년대부터 조경과 추모 기능을 갖춘, 지금의 민간 공원묘지가 도시 근교에 등장했다. 그뿐만 아니라 45년간 화장률은 20% 정도에서 90%로 늘어났다. 화장 후에도 봉안묘에서 자연 묘지로 추이가 달라지고 있다. 부모님의 평장묘도 화장 후 종이에 싼 유골을 땅 밑에 얕게 묻어 자연 분해되도록 하는 일종의 자연장이다. 그러니까 이번의 이장과 합장은 사후 부모님을 다시 만나게 해드린다는 애틋한 정서 때문이라기보다는 그간 상당히 바뀐 장묘문화의 변화, 즉 ‘간소하고 관리하기 편하게’가 반영된 것이다.
하지만 무덤은 본래 애도에 대한 사회적 기술로 출현한 것이다. <맹자>에서는 이 문제가 부모 시신을 버린 후 나중에 살쾡이 등이 파먹는 것을 보고 “차마 똑바로 보지 못하고 땀에 흥건히 젖는”, 그 인간다운 마음이 드러난 순간으로 묘사되어 있다. 이푸 투안처럼 말한다면, 무덤은 단순한 물리적 ‘공간’이 아니라 죽은 자의 흔적을 기억 속에 고정하고 남은 이들이 관계를 이어나가는 ‘장소’일지 모른다.
아버지의 무덤에도 장례 날 스산했던 첫 풍경 위로, 어린 조카들이 그곳에서 장난치며 놀던 기억, 어머니의 죽은 남편 뒷담화, 그로 인해 꼬리에 꼬리를 물고 꺼내진 아버지의 추억 등이 새겨져 있다. 때론 소풍 같았던 성묘. 이번 이장에서 수습된 아버지의 검은 해골 역시, 그 물질성 때문에 망자와 남은 이들의 강력한 연속감을 환기시킨다. 이제 부모님 묘지는 한 평 남짓으로 줄었지만, 갓 태어난 조카의 아이까지 등장하는 새로운 기억들이 그곳에 포개질 것이다.
그런데 이번 평장묘는 영속적일 수 있을까? 조카의 조카들은 세월이 흐른 후에도 이곳을 찾아줄까? 가능성은 희박하다. 앞으로는 비혼, 독신, 1인 가구가 더 늘어날 것이고, 가족이 있어도 전 세계에 흩어져 살 것이다. 우리보다 앞서 초고령, 다사(多死) 사회를 맞이한 일본의 사례는 그런 점에서 시사적이다. 도쿄 신주쿠 루리덴은 LED 불상 안쪽에 유골함을 안치해 카드 접촉 시 불빛이 켜지게 만들었다. 다이토쿠인 료고쿠 료엔 같은 도심형 봉안 시설은 로봇팔이 유골함을 찾아준다고도 한다. 무덤의 디지털화다.
어찌 되었든 무덤은 완연히 작아지고 평평해지고 있다. 우주먼지로 돌아가는 산분장(散紛葬)이 대세가 되면 물리적 무덤은 완전히 사라질지도 모른다. 그럴 때 애도 방식은 또 어찌 변할까? 좋은 시신이 되는 법과 애도의 다른 형식을 발명하는 것. 그 일이 마처세대인 나의 과제인 것 같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