형이상학적 동물들
클레어 맥 쿠얼·레이철 와이즈먼 지음
이다희 옮김
바다출판사 | 568쪽 | 2만7800원

<형이상학적 동물들>은 엘리자베스 앤스콤(1919~2001), 필리파 풋(1920~2010), 아이리스 머독(1919~1999), 메리 미즐리(1919~2018) 등 네 명의 지식인들에 대한 이야기다. 모두 영국인이고, 여성이며, 무엇보다도 철학자였다. 넷은 옥스퍼드대학교가 여성들을 받아들이기 위해 1879년 설립한 서머빌 칼리지에서 만나 평생의 친구가 됐다.
공저자인 아일랜드 출신 철학자 클레어 맥 쿠얼과 영국 출신 철학자 레이철 와이즈먼은 책 앞머리에서 “우리는 남성이 남성에 관해서 쓴 책들에 대해 이야기하는 남성들이 따분하게 느껴졌다. 그리고 두 사람이 친구로서 함께 철학을 하고 싶었다. 그래서 도움이 될 이야기를 찾아 헤맸다”고 밝혔다.
이야기는 한편으로 10대 후반부터 30대 후반까지 이들 4명의 삶을 따라가고, 다른 한편으로는 1930년대 이후 영국 철학의 주류로 부상한 논리실증주의를 상대로 이들이 벌인 철학적 전투의 궤적을 좇는다.

20세기 전반 여성이 영국에서 대학을 다닌다는 것은 어떤 의미였을까. 1948년까지 케임브리지는 여성에게 학위를 주지 않았다. 옥스퍼드는 1920년부터 여성에게 학위를 줬지만 1925년까지 여학생들은 보호자 없이는 강의실에 들어갈 수 없었다. 책 주인공 중 한 명인 메리는 학교 측으로부터 여학생이 바지를 입고 강의를 듣는 것은 교칙 위반이라는 경고를 받았다. 상류층 가정에선 딸을 대학에 보내지 않는 것이 미덕으로 간주됐고, 보수적인 부모들은 아들들이 여교수의 강의를 듣는 일을 모욕으로 받아들였다.
20세기 전반 영국 여성 철학자들
머독·풋·앤스콤·필리파의 궤적
전쟁과 실증주의 철학 영향으로
도덕적 판단에 대한 회의감 팽배
형이상학에 대한 공격들에 맞서
“나치에 ‘너희가 틀렸다’ 말해야”
삶의 윤리 고민하는 인간 옹호
엘리자베스, 필리파, 아이리스, 메리가 서머빌 칼리지의 교정을 거닐 무렵 영국에서는 논리실증주의라는 이름의 새로운 철학이 나타나 형이상학을 철학계의 왕좌에서 끌어내리고 있었다. 관념론자와 실재론자를 포함한 형이상학자들은 인간에게 도덕적 진리를 발견하고 도덕적 판단을 내릴 능력이 있다는 점을 의심하지 않았다. 반면 A J 에이어(1910~1989)를 비롯한 젊은 논리실증주의자들은 도덕적 판단이란 주관적 감정의 표현에 불과하다고 일축하면서 ‘형이상학의 종말’을 선언했다. “좀 더 깊거나 초월적인 것, 가치 있는 것이 아예 존재하지 않는다는 주장이었다. 따라서 철학의 탐구 대상이기도 한 우리의 존재 이유와 의무에 대해 평생 고민하는 것이 무의미하며, 그렇게 얻은 깨달음에 따라 살고자 하는 것 또한 무의미하다고 했다.” 네 사람은 논리실증주의의 과격한 주장에 동의할 수 없었다.

“형이상학을 싹쓸이하려는” 젊은 남성 철학자들의 공격은 1939년 9월 영국이 독일에 선전포고를 하면서 제동이 걸렸다. 남성들이 징집되거나 자원 입대했기 때문이다. 옥스퍼드에서는 자원 입대 대상 3000명 중 2362명이 입대했다. 남은 것은 양심적 병역 거부자들과 영국으로 피신한 대륙의 철학자들, 그리고 여성 철학도들이었다.
네 친구들은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하지만 전쟁이라는 특수 상황에서 철학에만 몰두할 순 없었다. 메리와 아이리스는 런던에서 전시협력 임무에 투입됐다. 메리는 생산부라는 이름의 정부 부처에서 원자재 할당 업무를 맡았고, 아이리스는 재무부에서 공식 서신을 읽고 분류·정리하는 일을 수행했다.

옥스퍼드에 남았던 필리파는 사회재건 조사팀의 일원으로 전쟁 전후의 인구와 산업 통계 정보를 수집하고 분석했다. 철학자로서의 고민이 깊었던 엘리자베스는 결혼한 뒤 케임브리지에서 연구를 이어가려 했지만 장학금 연장에 실패해 가난에 허덕였다. 하지만 당시 케임브리지에 있던 비트겐슈타인의 제자가 되면서 학문적으로는 도약의 계기를 얻는다. 비트겐슈타인은 엘리자베스가 둘째를 출산했을 때 입원비를 대신 내줬을 정도로 영국인 제자를 아꼈다.
1945년 전쟁이 끝났다. 중단됐던 일상이 돌아왔고, 남자들도 옥스퍼드로 돌아왔다. 전쟁 중 프랑스에서 복무하면서 사르트르의 실존철학까지 흡수한 에이어와 그의 동조자들은 형이상학을 소멸시키기 위한 작업을 재개했다. 엘리자베스, 필리파, 아이리스, 메리는 전쟁 전에는 호기심 많은 학부생에 불과했으나 전쟁을 거치며 학문적으로나 인간적으로 성숙한 사람이 됐다. 이들은 필리파의 응접실에서 함께 토론하고 고민하며 에이어 일파가 주도하는, 형이상학과 윤리학에 대한 공격에 한목소리로 반대했다. 나치가 유대인 수용소에서 벌인 만행이 알려진 이상, 논리실증주의의 가치중립적 태도를 받아들일 수 없다고 본 것이다. “나치에게 ‘우리가 옳고 너희는 틀렸다’라고 말할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이들에게 인간은 단순한 기계가 아니라, 삶의 의미와 윤리를 고민하는 ‘형이상학적 동물’이었다.
책은 지식인 네 명의 삶을 다룬 일종의 평전이면서, 동시에 형이상학과 논리실증주의의 대결을 다룬 사상사 저술이기도 하다. 아이리스의 아파트나 필리파의 응접실, 독일 공군의 공습을 견뎌야 했던 런던의 일상 등은 세밀하게 그려져 있다. 반면 이 여성들이 논리실증주의의 공세에 맞서 어떻게 형이상학과 윤리학의 가치를 지켜냈는지에 대한 서술은 부족하다. 소설가로 더 유명한 아이리스를 제외하면 한국에선 낯선 인물들이라는 점도 한국어판 독자 입장에서는 걸림돌이다.
원서는 2022년 영국에서 출간돼 영국역사작가협회 논픽션 크라운상을 수상했다. 부제는 ‘How Four Women Brought Philosophy Back to Life(‘네 명의 여성은 어떻게 철학을 삶으로 되돌려 놓았는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