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년 만에 ‘모래성’을 나와 주연이 된 청년···연극으로 불안에 맞서다

2025-12-09

무대 위 청년 11명이 낮은 목소리로, 체념한 듯이, 가슴 깊이 묵혀둔 답답함을 한껏 끌어내어 말하는 문장들로 연극은 시작한다. “그만하고 싶어” “언제까지 이렇게 살아야 해” “나아질 것 같지 않아” “나를 이대로 내버려 둬.” 김기준씨(31)는 잠자는 듯한 자세로 “이대로 잠들어 깨지 않았으면 좋겠어”라고 읊조린다.

7년간 고립·은둔 생활을 마치고 지난 6월 세상으로 다시 나온 김씨는 “이 대사는 제가 지난 7년간 가장 많이 한 생각”이라며 “사회에서 뒤처지는 것 같고 정해진 틀에서 떨어져 있는 것만 같았다”고 말했다.

곧이어 이들은 노래한다. “저 멀리 파도가 다가올까 / 모래성이 무너질까 두려워 / 자그마한 모래성 나만의 성안에서 / 이대로 나는 괜찮아···나는 숨이 막혀 / 나는 너의 손을 기다려.” 노랫말엔 김씨가 7년간 방 밖으로 나오길 머뭇거리던 마음이 묻어 있다.

생명보험사회공헌재단과 비영리사단법인 행복공장은 지난 4일 서울 서대문구 북아현아트홀에서 청년 마음공감 극장 프로그램으로 연극 <우리는 사랑할 수 있을까>를 무대에 올렸다. 생명보험재단은 대교 위 ‘SOS 생명의 전화’에서 2030 청년 내담자 비중이 가장 높은 점 등을 고려해 올해부터 연극 치유 사업을 시작했다. 이번 주제는 불안이다.

20대 초반에서 30대 중반의 청년들은 지난 5개월간 여태 지니던 불안을 하나둘 꺼냈다. 불안은 결점이 아닌 재료가 됐다. “힘들었을 때의 마음을 다 얘기해보자”는 연출진의 말에 김씨는 모래성을 떠올렸다. “파도가 오고 있는 것을 알고 있고 파도가 오면 모래성은 다 부서질 텐데도, 저는 제 방이라는 모래성 안에 숨어만 있다고 생각했었어요.” 동료들도 각자의 모래성에 감춰왔던 불안·우울·절망을 하나둘씩 꺼냈고, 그것은 곧 대사와 가사가 됐다.

김씨는 이번 프로그램을 통해 자신의 감정을 직면했다. 3박4일 집중 수업 캠프에서 짝꿍과 함께 “싫어” “왜”를 반복해서 말하는 등의 ‘감정 내지르기’ 연습을 했다. 가족·친구 관계나 직업·학업 등 여러 불안에 대한 10분 길이의 즉흥극을 짜고 발표하기도 했다.

특히 그는 정기 연극 워크숍에서 화난 사람, 행복한 사람, 궁금한 사람 따위의 여러 감정을 스스로 해석하고 연기한 과정이 가장 도움 됐다고 했다. 김씨는 “늘 화를 참는 성격이라 화난 사람을 표현하기가 참 어려웠다”면서 “그래도 감정을 계속 표현하다 보니 나중엔 셰어하우스의 동거인들과 갈등이 있을 때 기분 나쁘지 않게 내 의사를 전할 수 있게 됐다”고 말했다.

그렇게 은둔 생활 후 김씨의 첫 사회생활은 ‘주연 배우’가 됐다. 김씨는 무대에서 영어유치원-과학고-대기업까지 흔히 훌륭하다고 말하는 경로를 성실히 밟아온 상위 1%의 ‘기준’을 연기했다. 실제 삶과 비슷하진 않지만 연극 속 기준이 느끼는 외로움과 막막함은 현실 속 김씨가 이 방 안에서 느끼던 것과 비슷했다.

이제 그는 방 안의 또 다른 ‘기준’을 세상이라는 무대로 끌어내고 싶단다. 사회복지사 자격증 취득도 준비하고 있다. 김씨는 “함께 연극을 만들고 연기를 해냈다는 경험이 앞으로의 저에게 큰 힘을 실어줄 것 같다”고 말했다.

이번 프로그램은 비슷한 어려움을 가진 11명의 또래 청년이 매주 모이는 하나의 ‘커뮤니티’가 됐다. 또 다른 주연 배우였던 20대 여성 김채리씨도 “연극 전에 나는 ‘레전드 정신병자’였다”면서 “처음 이 프로그램을 할 땐 너무 불안해서 자리에 앉아있는 것도 힘들었다”고 털어놨다. 그러면서 “동료들과 같이 시간을 보내고 연극을 준비하다 보니 하고 싶었던 말들이 막 터져 나오기 시작했다”며 “동료들이 얘기를 잘 들어준 게 큰 도움이 됐다”고 말했다.

연극은 그들이 5개월간 빚어온 마음이 담긴 두 번째 노래로 막을 내린다. “파도가 오는 걸 알고 있었기에 / 두려웠기에 / 숨어버린 섬에도 꽃 피니까···긴 밤의 끝 / 새벽을 꿈꾼다 / 꽃이 펴야만 봄이 아니야 / 억지로 버티지 않아도 돼 / 나는 분명히 사랑받아도 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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