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장 정 총장 잡아와"…12월 12일, 전두환은 그렇게 헌정질서를 짓밟았다 [오늘의 그날]

2025-12-11

그날의 뉴스는 지나갔지만, 그 의미는 오늘에 남아 있습니다. ‘오늘의 그날’은 과거의 기록을 통해 지금을 읽습니다.<편집자주>

1979년 12월 12일. 보안사령관 전두환은 육군참모총장 정승화를 체포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이날 오후 6시, 전두환은 당시 대통령 권한대행이던 최규하 대통령에게 정 총장 체포에 대한 재가를 요청했지만 거절당했다. 그러나 오후 7시, 보안사령부 병력이 정승화 총장의 자택을 급습했고, 오후 7시 21분 그는 보안사 서빙고 분실로 강제 연행됐다. 무력 충돌과 병력 이동이 이어졌고, 밤사이 서울 시내는 공수특전여단 병력이 장악했다. 대한민국 헌정질서를 뒤흔든 12·12 군사반란의 서막이었다.

◇ “서울 장악하라”…전두환, 쿠데타 시나리오 작전 강행=10·26 사건 직후 합동수사본부장을 맡았던 전두환은 그해 11월 중순부터 이미 정승화 제거와 군부 장악을 위한 계획을 세웠다. 허화평, 허삼수, 이학봉, 장세동, 김진영 등 하나회 소속 또는 보안사 요원들이 주요 동조 세력으로 가담했고, 12월 8일에는 구체적인 작전 계획이 마련됐다. 12일 오후, 전두환은 박희도, 최세창, 장기오, 노태우, 황영시 등 동조 장성들을 경복궁 수도경비사령부 30경비단으로 소집해 서울 주요 지역 장악을 지시했다.

곧이어 1·3·5 공수특전여단이 서울로 투입됐다. 박희도 준장이 지휘한 제1공수여단은 행주대교 인근 30사단 병력을 무장해제하고 국방부와 육군본부를 점령했다. 이후 국방부 청사에서 노재현 국방장관을 포획해 대통령에게 인계했다. 최세창 준장이 지휘한 제3공수여단은 특전사 본부를 장악해 정병주 특전사령관을 생포했다. 이 과정에서 김오랑 소령이 사망하는 일이 발생했다. 장기오 준장의 제5공수여단과 노태우 소장이 지휘한 9사단 병력도 서울로 진입했다. 군 수뇌부에 저항하던 이건영 3군사령관, 장태완 수도경비사령관 등은 모두 무력으로 연행됐다.

전두환은 사건 발생 이후 최규하 대통령에게 세 차례에 걸쳐 사후 재가를 요청했고, 사건 발생 10시간 만인 13일 새벽 4시, 마침내 대통령의 재가를 받아냈다. 노재현 국방장관은 13일 오후 담화를 통해 정승화 연행 사실과 함께 이희성 대장의 육군참모총장 및 계엄사령관 임명을 공식 발표했다. 이를 통해 전두환은 군 인사권과 지휘 체계를 사실상 장악했고, 실질적인 군 내부 최고 권력자가 되었다.

◇ “미국도 반대했지만”…광주 유혈 진압 끝에 제5공화국 출범=12·12 사태 직후 미국 정부는 신군부의 일방적인 작전통제권 행사에 강력히 반발했다. 백악관과 국방부는 한국 내 민간정부만을 지지하겠다는 입장을 밝혔다. CIA는 북한의 남침 가능성을 50%로 판단하고 대응 태세를 강화했다. 하지만 2주가 지난 뒤, 미국 측의 공개 비판은 누그러졌고, 실질적으로 군부의 권력 장악이 묵인됐다.

1980년 1월, 군 장성들에 대한 대대적인 인사 개편이 단행됐고, 정권 장악에 비판적이던 장성들은 전출되거나 보직이 해임됐다. 같은 해 5월 17일, 신군부는 전국 비상계엄령을 선포했고, 18일부터 광주 민주 항쟁이 벌어졌다. 계엄군이 투입되며 광주는 유혈 진압됐다. 8월 최규하 대통령은 물러났고, 9월 1일 전두환이 제11대 대통령으로 선출됐다. 이후 헌법이 개정되며 제5공화국이 출범했다.

◇ “성공한 쿠데타는 처벌 못 해”…헌재도 각하 결정=문민정부 출범 이후 김영삼 대통령은 12·12를 “하극상에 의한 쿠데타적 사건”으로 규정했다. 역사 바로 세우기 작업은 박계동 의원의 노태우 비자금 폭로로 시작해 전두환과 노태우에 대한 고발로 이어지기까지에 이른다. 1994년 12월 검찰은 12·12 사건이 군사반란은 맞지만 국내의 혼란을 우려하여 기소 유예 처분한다고 발표했다. 1995년 1월 20일, 헌법재판소는 12·12 사건과 관련한 기소유예 처분에 대해 제기된 헌법소원심판에서 각하 및 기각 결정을 내렸다. 같은 해 7월, 검찰은 5·18 민주화 운동이 전두환의 정국 장악 의도에 따라 진행됐다는 수사 결과를 발표했지만, “성공한 쿠데타는 처벌할 수 없다”는 논리를 내세워 전두환을 기소하지 않았다.

◇ “반란죄 유죄 선고에도”…결국 사면된 전두환·노태우=1995년, 국회는 5·18 특별법을 제정했고 전두환·노태우에 대한 수사가 재개됐다. 이듬해 전두환은 사형, 노태우는 무기징역을 선고받았다. 항소심에서는 각각 무기징역과 17년형으로 감형됐다. 대법원은 이들 사건에 대해 반란죄와 내란죄를 확정 판결하면서 “폭력으로 정권을 장악하고 법질서를 훼손한 행위는 결코 용인될 수 없다”고 판시했다.

그러나 1997년 대선을 앞두고 김대중 대통령 당선자와 김영삼 대통령이 특별사면에 합의하면서, 12월 22일 전두환과 노태우 등 관련자 전원은 석방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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