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 누룩, 역사 속 살아 있는 미생물 공화국

2025-12-12

조선시대 양조 문헌에 의하면 우리 선조들은 겨울철에 술을 담갔다. 술을 만드는 데 필요한 누룩은 초복에서 말복 사이에 주로 빚었다. 높은 기온과 습도가 곰팡이와 효모의 번식에 유리하기 때문이다. 선조들은 이때 만든 누룩을 ‘하곡’이라 불렀다. 하지만 하곡만 있었던 것은 아니다. 만드는 시기도 다양해 봄에 만든 누룩인 ‘춘곡’, 가을에 만든 누룩인 ‘추곡’, 그리고 겨울에 만든 누룩인 ‘동곡’도 있었다.

누룩은 술을 만드는 데 필요한 발효제다. 전통적으로 누룩은 짚으로 덮인 흙방 안에서 빚었다. 곡물을 반죽한 후 나무틀을 이용해 원형이나 사각의 형태를 만든다. 곡물의 단내와 볏짚의 훈기 그리고 미묘한 흙의 숨결이 섞여 누룩 고유한 냄새를 만든다. 이때 은은한 열기와 함께 묵직한 냄새가 방안 가득 퍼진다. 그로부터 며칠이 지나면 표면에 하얗고 노르스름한 곰팡이가 피어난다.

이 덩어리가 바로 누룩이다. 우리 고유의 천연발효 중심이며, 선조로부터 오랜 세월 이어져 온 삶의 경험체다. 겉으로 보기엔 오래된 빵덩어리 같지만, 그 속에는 곡물 당화와 발효를 진행할 보이지 않는 오묘한 생명체들이 있다.

눈에는 보이지 않지만 누룩 한 덩어리 속에는 수천억 마리의 미생물이 살아 숨 쉬고 있다. 이들의 움직임은 마치 출근길의 도심 거리처럼 복잡하고 분주하다. 여기에는 누룩곰팡이와 효모 그리고 유산균이 있다.

선조들이 빚은 누룩 속 미생물은 처음부터 누룩에 있던 것은 아니었다. 곡물 자체에 존재하던 토착 미생물 이외에 양조장을 감싸던 공기와 볏짚 그리고 손에 묻은 작은 생명체들이 자연스럽게 모여든 결과였다. 이렇기 때문에 다른 주가에서 빚은 누룩은 서로 조금씩 다른 미생물의 세계가 탄생할 수 있었다. 그 결과 각 지역의 도가에서는 똑같은 술을 빚어도 조금씩 다른 향을 가진 개성 있는 전통주가 태어났다.

곰팡이에 대한 일반적인 인식은 부정적 이미지가 강하다. 습한 곳에서 피어나는 곰팡이를 더럽다고 느끼거나, 비위생적이고 건강에 해롭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곰팡이에는 우리에게 이로운 것도 많다. 우리가 잘 아는 ‘고르곤졸라’나 ‘카망베르’와 같은 치즈, ‘페니실린’과 같은 항생제 그리고 ‘된장’이나 ‘간장’과 같은 전통 발효식품 모두 곰팡이의 도움으로 만들어진 것이다. 누룩에서도 곰팡이는 곡물 속의 잠든 영양분을 깨워 알코올 발효가 시작되도록 만드는 유익한 존재다.

누룩에서 자주 발견되는 곰팡이로는 아스페르길루스 오리재(Aspergillus oryzae)가 있다. 아스페르길루스 오리재는 곡류 발효 문화권 어디서나 사랑받는 곰팡이다. 우리 전통 누룩에서 이 곰팡이는 효소라는 열쇠를 사용해 알코올 발효의 첫 관문을 연다. 아스페르길루스 오리재가 곡물을 기질로 사용해 당을 풍부하게 만들면서 발효 반응의 출발점을 마련한다. 곡물의 전분을 당으로 바꾸는 분해자 역할을 하는 것이다. 이 과정에서 술이 가지는 감미의 기반도 함께 형성된다.

전통 누룩곰팡이에는 아스페르길루스 오리재만 있는 것은 아니다. 리조푸스 오리재(Rhizopus oryzae)라는 또 다른 누룩곰팡이도 있다. 이 곰팡이도 전통주를 만드는 과정에서 다재다능한 역할을 수행한다. 단백질 가수분해 효소의 활성이 높아 곡물 속 단백질까지 효과적으로 분해한다. 이로 인해 아미노산이나 펩타이드를 만들어 전통주가 감칠맛이 나게 한다.

당을 술로 바꾸는 마법사, 그리고 그들을 지키는 파수꾼들

곰팡이가 준비한 자리를 차지하는 다음 주인공은 ‘효모’다. 생물학적으로 효모도 곰팡이의 일종이지만, 누룩에서 효모는 누룩곰팡이가 만든 당을 소비해 알코올을 생성하는 역할을 담당한다. 사실 효모는 인류 음식 문화의 역사를 함께한 동반자다. 우리 전통술 이외에도 빵이나 와인, 맥주를 만드는 데 유용하게 쓰인다.

누룩곰팡이와 효모 이외에 누룩에 존재하는 또 다른 구성원은 놀랍게도 ‘세균’이다. 세균은 누룩에서 품질과 안전을 책임지는 숨은 설계자 역할을 한다. 누룩이 숙성될 수 있는 환경을 안정화하고, 미생물 간 균형을 맞추는 파수꾼 역할이다. 효모가 무대의 주인공이라면 세균은 그 무대를 매끄럽게 만드는 무대 감독이라 할 수 있다.

누룩 속 세균인 젖산균은 발효의 초입에서 산도(pH)를 조절해 다른 유해균이 자라지 못하게 막는 일을 한다. 술이 상하지 않고 온전한 맛을 유지하도록 조율하는 것이다. 대표적인 젖산균인 락토바실루스는 누룩에서 젖산을 만들어 술에 상쾌한 산미를 부여하며, 효모가 마음껏 활동하도록 돕는 역할을 한다. 또 다른 젖산균인 류코노스톡은 발효 초기에 미생물 경쟁을 정리하는 역할을 하며, 복잡한 누룩 속 환경을 안정화한다. 전통 막걸리의 밝고 산뜻한 첫 향도 이 세균 덕분이다.

이런 세균들 덕분에 누룩곰팡이와 효모가 만들어내는 발효가 안정적으로 지속한다. 우리 생활에서 세균 역시 곰팡이만큼이나 혐오스러운 이미지를 갖지만, 누룩 속에서는 오히려 술의 품질과 안전을 지키는 필수 요소가 된다.

한국의 누룩, 중국의 ‘취(曲)’, 일본의 ‘코지(麹)’는 모두 곡물 발효에서 출발한 동아시아의 곡물 발효제다. 그러나 세 나라는 서로 다른 철학으로 발효 문화를 발전시켰다.

중국의 취는 대규모 생산에 적합하도록 효율성을 우선했고, 일본의 코지는 단일 균주를 배양해 향미의 정제미를 추구했다. 반면 한국의 누룩은 자연발효의 복합성과 미생물의 다양성을 품으며 독자적 방식을 지켜왔다. 우리의 방식은 다양한 미생물이 빚어낸 다채로운 풍미의 세계를 자랑한다. 이는 자연의 혼돈에서 피어난 또 다른 형태의 발효 예술이라 할 수 있다.

전라도의 전통주는 부드러운 감칠맛을, 경상도는 진한 향을, 강원도는 맑고 산뜻함을 자랑한다. 이 모든 차이는 지역 누룩 속 미생물 군집이 달라서 생긴 것이다. 누룩 속 다양한 미생물 군집의 종류와 비율은 지역의 기후와 미세환경에 따라 변한다. 그래서 같은 방식으로 만들어도 누룩은 해마다 닮은 듯 다르게 태어났다. 이러한 변동성은 오히려 누룩 속 미생물 스펙트럼을 풍부하게 하고, 각 지방 술의 고유한 풍미를 형성했다. 우리의 누룩은 선조의 기술이 만든 구조에 자연의 손길이 생명의 질감을 더한 협연이라 할 수 있다.

최근에는 국내에서 전통 누룩의 미생물 군집을 분석하고, 누룩에 대한 안전성과 재현성을 갖춘 표준화 연구가 활발하다. 전국 각지에서 전통 누룩을 수집해 누룩 미생물 군집을 정밀하게 분석하고, 누룩 제조 조건을 체계적으로 연구하고 있다.

전통 누룩의 미생물 다양성은 우리 미래 식문화 혁신의 소중한 자원이다. 누룩은 단순한 발효제가 아니라 우리 문화와 생명이 함께 진화한 역사적 산물이다. 우리는 누룩을 통해 자연과 공존하는 법을 배우고 있으며, 서서히 익어가는 삶의 맛을 체험하는 과정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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