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5년 7월, 제2차 세계대전의 포성이 멎어가던 시기, 미국 과학연구개발국장이었던 버니바 부시(Vannevar Bush)는 프랭클린 D. 루즈벨트 대통령에게 <과학: 끝없는 개척지(Science: The Endless Frontier)>라는 보고서를 제출했다. 이 보고서는 단순한 행정 문서를 넘어, 현대 국가가 과학기술을 어떻게 바라보고 지원해야 하는지에 대한 철학적 기반이자, 국가와 과학계 사이에 맺어진 ‘사회적 계약’의 초석이 되었다. 버니바 부시는 전 미국 과학자들의 의견을 모아 과학적 진보가 국가의 안보, 국민의 건강, 그리고 경제적 번영을 위한 필수 불가결한 요소임을 역설했다. 종전 이후 이 내용을 기초로 미국 과학연구개발국(OSRD)의 후신인 국가과학재단(NSF)이 설립되고 과학기술 정책이 세워져감에 따라, 다른 동맹국들도 이러한 기조로 정책을 만들어 가게 되었다는 점에서 기념비적인 원천 문서라고 할 수 있다. 또한 거대언어모형(LLM) 기반의 인터넷 번역도구로 인해 관심있는 독자들에게 과거 어느 때보다도 그 내용에 접근이 쉬워졌다. 이번 글에서는 1945년 버니바 부시가 제시한 핵심 가치가 오늘날 대한민국에 어떻게 투영되었는지, 그리고 우리는 어떠한 미래를 설계해야 하는지를 살펴보고자 한다.

머릿말을 제외하면 보고서 전체가 신국판형으로 220쪽인데 그 중 본문은 앞의 42쪽에 불과하고 나머지는 부록이다. 본문에서 원론을 다루고, 독자들의 관심 영역에 따라 뒤에서 세부적인 내용을 살펴보라는 취지로 짐작이 된다. 뒤의 부록은 바로 전 해에 루즈벨트 대통령이 버니바 부시에게 보낸 서한을 통해 제시한 네 가지 근본적인 질문들을 각 분야의 대표적인 과학자들이 모여서 답한 내용으로 이루어져 있다. 질문은 다음과 같이 요약된다.
1. 전쟁 중에 얻게 된 기술적 진보를 과학 지식의 형태로 전 세계와 신속하게 공유하는 방법은?
2. 전쟁 중에 함께 이루어진 질병과의 싸움에서 얻어진 의학의 발전을 국가적인 사업으로 지속시켜나갈 방법은?
3. 정부와 민간 기관의 연구 활동을 지원하기 위해 정부가 해야 할 일은?
4. 자라나는 세대의 과학적 재능을 발굴하고 육성하기 위해 정부가 해야 할 일은?
이렇듯 먼 미래를 내다보는 질문을 하게 된 배경에는 아마 2차 대전의 참상을 목격한 인류가 앞으로는 섣불리 전쟁을 일으켜서 국가 간의 문제를 해결하지 않으려고 할 것이라는 기대가 깔려 있다. 기울어진 전세에서 승자가 될 것임을 예감하여 자진해서 전 세계와 지식을 공유하며 재건하려는 ‘승자의 여유’ 또한 돋보인다.

본문의 흐름을 보면 1장 서론을 지나고 바로 2장에서 의학 연구에 대한 권고내용을 다룬다. 그만큼 중요하고 우선적으로 설정되어야 하는 방향이기 때문이다. 1, 2차 세계대전과 같이 국가 비상 상황에서는 전장에서 군인들이 전사하거나 병사하는 것을 최소로 줄이기 위해 촌각을 다투며 연구 예산과 노력을 집중 투입했고, 이 과정에서 개발된 페니실린과 설파제, 개선된 백신, 그리고 외과수술의 빠른 발전이 이제는 평화로운 국가에서 일반인들에게 널리 보급될 차례가 된 것이다. 여기서 주목할 점은 새로운 약의 개발이 “노력의 결과로”가 아닌 “노력하는 과정에서” 이루어졌다는 표현이 보고서 곳곳에서 발견된다는 것이다. 어떠한 목적을 위해 특정된 기술의 수준이나 기계의 성능을 자본과 노력의 투입으로 개선시키는 것은 명확한 인과관계로 연결시킬 수 있다. 하지만 어떠한 기술의 한계에 도달했을 때 이를 과학적 혁신으로 돌파하는 것은 어느 한 연구 주체의 연구력에 기인한 것으로 단정하지 않는 자세를 취한다. 다시 말해, 전 세계 과학자들이 서로의 성공, 실패 사례를 공유해 가면서 집단적으로 어떠한 통찰을 얻어가다가 누군가가 우연히 문제의 해결책을 발견하는 형태로 혁신이 이루어진다는 것을 몸으로 익혔던 이들의 자세라고 할 수 있다.
버니바 부시 보고서의 핵심은 “기초 연구는 기술 진보의 박동 조율기(pacemaker)”라는 문장으로 요약된다. 보고서는 기초 연구가 실용적 목적 없이 수행되더라도, 그 결과는 궁극적으로 새로운 산업과 일자리와 국가 안보를 창출하는 ‘과학적 자본(scientific capital)’이 된다고 보았다. 보고서에서 제시한 전후 미국과 동맹국들의 핵심 가치는 크게 세 가지로 요약할 수 있다. 첫째, 정부의 지원 의무이다. 민간 기업은 이윤 추구의 속성상 장기적이고 불확실한 기초 연구에 투자하기 어렵기 때문에, 정부가 이를 지원해야 한다는 것이다. 둘째, 연구의 자율성(freedom of inquiry)이다. 버니바 부시는 과학적 진보가 “자유로운 지성의 자유로운 활동”에서 비롯된다고 믿었으며, 연구 주제의 선택과 수행 방식에 대한 내부 통제권을 연구자에게 일임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셋째, 인재 양성의 보편성이다. 그는 경제적 장벽을 제거하여 모든 재능 있는 젊은이들이 과학 교육을 받을 수 있도록 해야 하며, 이것이 국가의 가장 중요한 자원인 지성을 보존하는 길이라고 믿었다.
대한민국 역시 이러한 모델을 받아들여 한국연구재단(NRF)을 설립하고, 정부 주도의 강력한 R&D 투자를 통해 추격자(fast follower)에서 선도자(first mover)로의 전환을 꾀해왔다. 특히 버니바 부시 보고서가 강조한 인재 양성의 가치는 자원이 빈약한 한국이 인적 자본에 집중하여 경제 대국으로 성장하는 밑거름이 되었다.

80년의 세월이 흐른 2025년 현재, 대한민국은 격동의 시기를 겪었다. 윤석열 전 대통령의 탄핵과 새로운 정부의 출범이라는 정치적 소용돌이 속에서, 우리는 과학기술 정책이 국가의 근간을 어떻게 흔들 수 있는지, 그리고 그 무너진 신뢰를 회복하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과제인지를 목도했다. 2024년 R&D 예산의 전례 없는 대폭 삭감은 단순한 재정 긴축의 문제가 아니었다. 이는 1997년 IMF 외환위기 때도 지켜졌던 과학기술에 대한 국가의 지원 약속을 파기한 것이었다.
지난 정부가 배신한 가장 중요한 가치는 ‘신뢰’와 ‘연구의 자율성’이었다. 정부는 명확한 근거 없이 과학계를 ‘이권 카르텔’로 매도하며 예산 삭감을 단행했다. 이는 버니바 부시 보고서에서 강조한 “연구의 자유와 건강한 경쟁심”을 정면으로 위협하는 행위였다. 노벨상 수상자들조차 한국 정부의 이러한 결정에 대해 “과학적 발견과 선거의 주기는 다르다”며 정치 논리가 과학을 압박해서는 안 된다고 경고했다.
또한, ‘안정성’이라는 핵심 가치도 무너졌다. 보고서는 연구 지원에 있어 자금의 안정성과 연속성을 강조했으나, 지난 정부는 예고 없는 삭감으로 연구 현장의 예측 가능성을 파괴했다. 특히, 학생 인건비 삭감과 신규 과제 중단은 미래 세대인 ‘과학적 인재’의 생계를 위협하고 이공계 이탈을 가속화시켰다. 이는 보고서에서 “모든 소년 소녀가 능력이 있다면 하늘만이 한계임을 알게 해야 한다”라고 했던 인재 양성의 철학을 정면으로 거스르는 것이었다. 심지어 4대 과학기술원 예산을 교육부로 이관하려던 시도는 과학기술 특성화 대학의 독립성과 수월성을 훼손하려는 시도로 비판받았다.
국제 공동 연구 예산을 대폭 증액하면서 국내 기초 연구 예산을 삭감한 것은, 보고서에서 기술한 “국제적 과학 정보의 교류”의 취지를 왜곡한 것이었다. 국내 연구 역량이 뒷받침되지 않은 상태에서의 일방적인 국제 협력 강요는 현장에서 “눈먼 돈”으로 치부되었으며, 실효성을 거두기 어려웠다.

현 정부는 훼손된 과학기술 생태계를 복원하기 위한 긴급 조치에 착수했다. 2025년 11월 13일, 과학기술정보통신부가 발표한 ‘2026년 기초연구사업 시행계획’은 이러한 반성과 회복의 의지를 담고 있다. 새로운 계획의 핵심은 ‘기본으로의 회귀’와 ‘연구자 중심의 지원’이다. 잠시 길을 잃었던 대한민국이 다시금 그 개척지로 향하는 나침반을 바로 잡으려는 지금, 우리가 같은 실수를 반복하지 않기 위해 필요한 것은 무엇인가?
첫째, ‘과학기술 예산의 법적 보호’가 필요하다. 정권의 입맛에 따라 R&D 예산이 널뛰기하지 않도록, 국가 총지출의 일정 비율 이상을 R&D에 투자하도록 법제화하거나, 버니바 부시 보고서에서 제안했던 것처럼 외부의 정치적 압력으로부터 독립된 기구(가칭 국가과학기술위원회 등)가 예산 배분의 실질적 권한을 갖도록 거버넌스를 개편해야 한다. 버니바 부시 보고서가 제안한 국립연구재단의 핵심 원칙 중 하나는 “자금 지원의 안정성과 연속성”이었다.
둘째, ‘신뢰 기반의 평가 시스템’ 정착이다. 이번 2026년 계획에서 시도된 평가 간소화와 단계 평가 주기 확대는 긍정적인 신호다. 그러나 이것이 일시적인 시혜가 아니라 제도로 정착되어야 한다. 과학적 발견은 실패를 먹고 자란다. 실패를 용인하고, 성과 중심이 아닌 과정 중심의 평가 문화를 사회 전반에 뿌리내려야 한다.
셋째, ‘미래 세대와의 소통’이다. 지난 R&D 예산 삭감 사태에서 가장 큰 피해를 입은 것은 학생 연구원들과 신진 과학자들이었다. 카이스트 졸업식 입틀막 사건과 같은 불통이 다시는 일어나선 안 된다. 정책 입안 과정에서 현장의 목소리, 특히 미래 과학자들의 목소리가 반영될 수 있는 제도적 장치가 마련되어야 한다.
마지막으로, ‘과학에 대한 사회적 합의’를 다시 세워야 한다. 과학기술 투자는 비용이 아니라 미래를 위한 저축이라는 인식을 국민과 정치권이 공유해야 한다. 1945년 버니바 부시가 꿈꾸었던 “질병 없는 세상, 국가 안보, 그리고 풍요로운 삶”은 여전히 유효한 우리의 목표다. 새로운 정부의 R&D 복원 계획이 단순한 원상복구를 넘어, 대한민국이 진정한 선도자로서 ‘끝없는 개척지’를 항해하는 튼튼한 배가 되기를 기대한다.
양창모 이학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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