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작은 우연이었다. 방송사 공채 재도전을 작정하고 어학연수를 위한 미국행을 사흘 앞둔 1996년 초겨울 어느 날 아침. 결의와 다짐을 소주잔에 담으며 온 밤을 보내고 학교 앞 목욕탕 수면실에 친구들과 누워 있는 사이로 주인아저씨가 고개를 내밀었다. “김성주씨, 여기 계십니까?”
긴급함에 목욕탕 입구까지는 질주했지만 남탕까지는 진입할 수 없던 여동생의 부름을 대신 전하는 속삭임이었다. 학교 앞에서 함께 자취하던 여동생은 이른 아침 집으로 걸려 온 전화를 받고 급히 오빠를 찾아 나섰다. 발신인은 케이블채널인 국정방송 KTV PD였다. 그해 KBS 아나운서 공채 최종 면접 탈락자였던 김성주에게 오디션을 볼 의향이 있냐는 물음이었다. 고민은 길지 않았다. 모든 준비를 마쳤던 미국행을 취소하며 불안한 신분으로나마 아나운서로 첫발을 내딛기로 한다. 김성주의 방송인 운명은 그렇게 며칠 사이의 선택으로 시작됐다.
우연이라고 할 만한 일이 이어졌다. 그러나 우연 하나하나를 필연의 해피엔딩으로 만든 힘은 남다른 준비 습관이었다.
재수, 3수, 4수 끝에 2000년 MBC 공채를 통과한 뒤 초고속으로 빅매치 스포츠 캐스터 자리를 잡을 수 있었던 것은 1997년 한국스포츠TV(SBS스포츠 전신)로 둥지를 옮겨 야구와 농구 등 프로스포츠를 일상으로 중계한 덕분이었다. 시드니올림픽이 한창이던 2000년 아나운서실 막내로 국내 스튜디오에서 ‘오늘의 올림픽’을 진행하던 중에 큰 숙제가 하나 떨어졌다. NBA(미국프로농구) 스타들이 주력이던 미국 농구 드림팀이 주목받던 올림픽이었다. 시드니 현지 제작진에서 “김성주라면 할 수 있지 않겠냐”는 의견이나왔다. 미국 드림팀 경기 하이라이트를 편집해놓을 테니 중계를 해달라는 요청이었다.
말하자면 5분짜리 더빙. 김성주는 베테랑 가수가 본인 히트곡을 부르듯 한 번의 막힘도 없이 중계를 마쳤다. 김성주는 “그때의 5분이 좋은 인상을 준 것 같다”며 “앞서 스포츠TV에서부터 이름 하나, 동작 하나 익숙한 선수들이었다. 결국에는 경험이 내기엔 큰 힘이었다”고 말했다.
김성주가 스포츠TV에서 NBA를 중계하던 1990년대 후반은 미국프로농구 인기가 국내에서도 하늘을 찌르던 때였다. 마이너리그 야구선수 외도를 마치고 돌아온 마이클 조던이 NBA 코트를 다시 호령하던 그 시절, 김성주는 예습과 복습을 거듭하며 NBA를 파고들었다.
입사 3년 차인 2002년 한일월드컵 터키와 3,4위전에서 중계석에 앉는 파격 캐스팅도 ‘스포츠 중계’를 화두로 사내에서부터 빠르게 신뢰를 얻은 덕분이었다. 대중에 깊이 각인된 2006년 독일월드컵에서 차범근 감독과 시청률 대박을 터뜨린 것도 미국 스포츠 등 다양한 중계를 참고로 나름의 접근법을 체화한 데 있었다. 김성주는 “지금은 스토리를 곁들인 미국식 중계가 일반화돼 있지만 그때만 해도 그렇지 않았다”며 “독일월드컵에서 아버지 차범근 감독과 아들 차두리 선수와 함께 3인 중계를 한 것도 그때는 새로운 시도였다”고 기억했다.
김성주는 1990년대 후반부터 당시 보편화해 있던 PC 통신을 통해 국내외 스포츠 마니아들의 글을 읽고, 각 종목 해외 스포츠 사이트를 서핑하며 축구, 야구, 농구 관련 정보를 눈으로 머리로 익혔다. 스포츠 캐스터 데뷔 시절부터 어떤 종목을 중계하든 마이크를 차기 전까지 관련 종목을 최대한 분석하고 메모했다. 지금은 중계방송 준비 과정에서의 습관이자 루틴이 됐다.
<뭉쳐야찬다>를 비롯한 스포츠예능 진행자로서도 굳건한 자기 영역을 만들어놓은 김성주는 지난해 12월 김성근 최강야구 감독과 스포츠경향 특집 대담에서 스스로 “고비가 많았지만 그때마다 운이 따랐다”고 말했다. 2002년 한일월드컵을 시작으로 ‘월드컵·올림픽 캐스터’로 자리를 잡는 과정에서 ‘우연과 행운’이 작용했다는 겸손함을 보였다.
그러나 김성주가 그때마다 필연 같은 해피엔딩을 만들 수 있었던 것은 갑작스러운 부름에도 부응할 수 있는 준비성이 있었기 때문이다. 1996년 늦은 달 어느 날, 목욕탕에서 바뀐 인생행로. 김성주는 오늘도 무언가를 메모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