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인가 시스템인가 [이보형의 퍼블릭어페어즈]

2025-03-08

잘 차려진 음식도 그릇이 부실하면 맛과 멋을 살릴 수 없다. 기업이나 정부가 공들여 만든 정책·시스템·매뉴얼은 훌륭한 요리 레시피나 다름없지만, 결국 이를 담아내고 완성하는 것은 사람이다. 정책과 시스템은 내용이고, 사람은 그 내용을 담아내는 그릇이다. 그릇이 기울어져 있거나 금이 가 있으면 아무리 좋은 음식도 흘러내리기 마련이다. 조직이 높은 비용을 들여 완벽에 가까운 매뉴얼을 만들어도, 이를 운영하는 사람이 제대로 준비되어 있지 않으면 일이 제대로 되기 힘들고, 심지어 위기 상황까지 초래할 수 있다.

2018년과 2019년에 발생한 보잉 737 MAX 추락 사고는 시스템과 매뉴얼이 아무리 완벽해 보여도 이를 운영하는 사람이 제대로 준비되지 않으면 어떤 결과가 벌어지는지 단적으로 보여준다. 보잉은 기체의 기수를 자동으로 낮추도록 설계한 조정특성보강시스템(MCAS)을 도입해, 새로운 엔진 설계에 따른 비행 특성을 보완하려 했으나, 내부 보고 체계가 원활히 작동하지 않았고, 비용 절감에 매달린 나머지 조종사 교육 역시 최소화되었다.

결국 MCAS의 작동 방식과 문제점이 제대로 전달되지 않은 상태에서 두 차례 추락 사고가 일어나 수백 명이 희생되고 말았다. 사고 원인 조사 보고서와 이후 드러난 사실들을 종합해 보면, 만약 보잉 내부에서 위험 신호가 제대로 공유되고 조종사들이 새로운 시스템에 대해 충분한 정보를 받았더라면, 그토록 참혹한 결과는 막을 수 있었을 것이라는 점이 분명해진다.

정책에서도 마찬가지다. 2003년 440만명 수준의 비정규직이 2007년 570만명까지 늘어나자 정치권은 불안정한 근로환경을 개선하기 위해 2009년 2년 이상 초과근무시 정규직으로 전환을 강제하는 비정규직 입법에 나섰다. 당시에도 논란이 많았지만 국회는 결국 이를 통과시켰다. 그러나 2024년 비정규직 근로자수는 845만명을 넘어서면서 실질적인 효과는 거의 나타나지 않고 있다. 당시의 논란을 되짚어 보면, 비정규직 문제의 핵심은 정규직과 비정규직 차별에 있다는 의견이 많았고, 단순히 기간 기준으로만 입법하는 것은 한계가 크다는 점을 여러 전문가들이 지적했었다.

그럼에도 당시 입법을 추진하던 그룹이 표결을 강행하면서 결과적으로 정규직과 비정규직의 격차는 더욱 심화되었고 비정규직이 정규직으로 전환될 수 있는 길도 한층 좁아졌다. 이처럼 제도를 만드는 과정에서도 목표와 수단을 정확히 일치시키는 사람들의 지혜, 제도를 본래 취지에 맞게 운용하려는 사람들의 합의가 뒷받침되지 않으면, 제도 자체가 오히려 독소가 될 수 있음을 보여주는 사례이다.

반면 준비된 사람들이 제도와 시스템을 잘 활용하면 어떤 결과를 보여줄 지 극명하게 대비되는 경우도 있다. 2020년 전 세계를 휩쓴 코로나19 팬데믹 당시, 각국 보건 당국은 감염병 대응 매뉴얼을 이미 보유하고 있었다. 하지만 실제로 이를 제대로 실행한 곳은 그리 많지 않았다. 과학적 권고보다 정치적 이해관계가 앞서고, 현장에 있는 의료진이나 공무원들이 충분히 훈련받지 못한 상황에서 시스템이 아무리 정교해도 소용이 없었다. 반면 한국·일본·대만 등은 달랐다. 전염병 대응 시스템이라는 내용물을 잘 담아낼 만한 그릇이 이미 준비되어 있었다. 이들은 사스, 신종플루, 메르스 사태 등 동아시아 지역에서 잇따라 발생한 감염병들을 겪으며, 일련의 방역 지침과 시민들의 행동 요령을 지속적으로 실험하고 보완해 왔다. 매뉴얼과 숙련된 현장인원은 전세계 치명율이 1%일 때 10분의 1 수준으로 사망률을 억제하여 국민들의 생명을 지켜냈다. 매뉴얼과 시스템이라는 내용물에, 사람이라는 그릇이 견고하게 맞물릴 때만이 훌륭한 결과를 담보할 수 있는 것이다.

결국 기업과 정부가 정책을 효과적으로 운영하고 위기를 극복하는 힘은 사람에게서 나온다. 제도·시스템·매뉴얼이 제대로 작동하도록 하려면 문화가 바뀌어야 한다. 위험 신호를 누구든 눈치 보지 않고 공유하고 논의할 수 있어야 하고, 담당자들이 반복적인 시뮬레이션과 교육으로 실제 상황을 예측하고 이슈가 발생했을 때 즉시 대응할 수 있어야 한다. 아무리 좋은 의도의 제도나 훌륭한 시스템이 마련되어도 올바르게 활용되지 않으면 무용지물이 되고, 반대로 아무리 유능한 인재가 있어도 체계적인 매뉴얼 없이 즉흥적으로만 대처한다면 지속가능한 성과는 요원해 진다.

Menu

Kollo 를 통해 내 지역 속보, 범죄 뉴스, 비즈니스 뉴스, 스포츠 업데이트 및 한국 헤드라인을 휴대폰으로 직접 확인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