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독] '작전명 고파도'…6·25 때 섬에 추락한 남아공 용사 찾는다

2025-04-07

지난달 31일 오전 10시 충남 서산시 팔봉면 고파도. 인구 100명이 채 되지 않는 서해 외딴 섬의 바닷가에서 6명의 군인이 삽과 호미로 땅을 헤집는 데 여념이 없었다.

3명이 먼저 삽으로 모래를 파자 뒤따르는 3명이 집요할 정도로 집중하며 호미로 모래 속에서 뭔가를 찾는 식이었다. 정체 모를 물체가 호미에 걸리자 6명이 우르르 달려들었다. “이것도 아니네….” 이내 짧은 탄식이 새 나왔다.

이들이 찾고 있는 건 6·25 전쟁에 참전했다 1953년 실종된 남아프리카공화국(남아공) 유엔군 조종사 A의 유해였다. 국방부 유해발굴감식단(국유단)이 2000년 창설 이래 처음 진행 중인 섬 유해 발굴 작업으로, 거창한 작전명은 없지만 이들은 이를 ‘고파도 작전’으로 불렀다. 고작 스물넷의 나이, 이역만리에 파병돼 대한민국 국민을 지키기 위해 전투기를 몰다 끝내 고국으로 돌아가지 못한 그의 일부라도 가족 품으로 돌려 보내주기 위한 여정이다.

지난달 24일 시작된 고파도 작전은 오는 11일까지 3주간 진행된다. 이 기간 투입되는 인원은 7명. 중사 1명, 병사 6명으로 구성된 분대 규모의 팀은 작전 기간 팔봉면 구도항 인근 부대 주둔지에서 머물며 매일 오전 7시쯤 여객선으로 섬으로 향한다. 40분 넘게 배를 탄 뒤 고파도 선착장에서 내려 1.2㎞ 거리를 각종 장비를 들고 30분 넘게 걸어가야 현장이 나타난다. 오전 9시쯤 작업이 시작돼 오후 4시까지 말 그대로 삽질과 호미질의 연속이다.

이날은 작전이 시작된 지 1주일째였지만, 기상 때문에 전주 3일간 배가 뜨지 못한 데다 주말이 겹쳐 실제로는 현장 작업 3일 차였다. 팀장인 최원영 중사는 “배가 뜨지 못하는 상황이 또 올 수 있다”며 “이번 주에는 덤불 작업을 끝내고 다음 주에는 산으로 가야 하니 열심히 해보자”고 팀원들을 독려했다.

최 중사가 말한 덤불 작업은 가로·세로 5m씩, 모두 18개 구획으로 측정된 구역을 샅샅이 훑는 작업이었다. 모래사장과 인접한 80~100m 길이 땅을 인력으로만 갈아엎어야 한다는 의미다.

최 중사는 이를 “세월을 벗겨내는 작업”으로 표현했다. 그는 “사전에 층위를 파악해보니 70여년간 쌓인 퇴적층을 제거하려면 한 삽 깊이만큼 파내야 한다는 결과가 나왔다”며 “더 깊게 들어가지 않아 그나마 다행”이라고 말했다. 1개 구획 당 작업 소요 시간은 약 40분으로, 휴식 시간을 고려하면 이날 5개 구획 작업을 마치는 게 목표였다.

하지만 억새를 베어내는 기초 작업부터 쉽지 않았다. 질기게 얽힌 억새로 발 디딜 틈도 없는 덤불에서 팀원들은 바닥이 보일 때까지 반복해서 벌목도를 휘둘렀다.

사실상 흉기나 다름없는 도구. 결국 작업 중 사고가 발생했다. 한 병사가 억새를 끊어내다 벌목도로 자신의 무릎을 찍었다. 피흘리는 병사는 마을 주민들의 도움으로 해양경찰의 연안정을 타고 육지로 향했다. 여섯 바늘을 꿰매는 것으로 치료는 끝났지만, 아찔한 순간이었다.

병사들은 이를 고파도 작전의 의미를 되새기는 계기로 삼았다. 이들은 “마냥 단순하게 생각할 노동이 아니다. 집중력을 잃으면 안 된다”고 서로를 독려했다.

사실 몸보다 더 힘든 것은 마음의 영역이다. 아무리 파도 성과물이 나오지 않을 때 차곡차곡 쌓이는 허탈함이 가장 큰 적이다. 이날은 야속하게도 더 살펴볼 만 한 해양 쓰레기마저 자주 나타나지 않았다. 분대장을 맡은 김성동 병장은 “사실 사막에서 바늘 찾는 기분이 들 때 더 힘들어진다”며 “심리적으로 쫓기는 느낌도 없지 않다”고 말했다.

고파도 작전은 예상치 못한 제보로 시작됐기에 의구심을 물리치는 게 또 다른 난제다. 지난해 10월 국유단 로고가 새겨진 차량이 충남 보령시에 들렀는데, 70대 주민이 다가와 “미군 비행기가 고파도에 추락한 걸 알고 있냐”고 말을 걸어왔다.

국유단 관계자들은 해당 제보를 근거로 고파도를 찾아 5명으로부터 비슷한 증언을 얻어냈다. “초등학교 때 마을 해수욕장에서 모래 속에 박힌 낙하산으로 이불을 만들었다더라” “칡을 캐다 유해가 발견돼 근처 야산에 매장했다고 한다” “모래사장에 있던 벽돌공장 작업 중 뼈가 나온 적이 있다고도 한다” 등 목격담이 전언 형식으로 나왔다.

국유단 관계자는 “최근이라고 할 만한 증언이 1970년대 시점에 머물러 있었다”면서도 “그러나 비슷한 내용이 반복돼 신빙성이 꽤 있다고 평가했다”고 말했다.

국유단은 이를 근거로 미 국방부 전쟁포로·실종자확인국(DPAA)에 관련 내용을 문의했다. 이 과정에서 A의 존재가 확인됐다.

DPAA 기록에 따르면 남아공 공군(S.A.A.F) 제2전투비행대대(미 제18전투비행전대 배속) 조종사 A가 1953년 8월 28일 당시 미 측 전투기였던 노스아메리칸 F-86 세이버에 탑승해 훈련을 진행하다 실종됐다. 불과 한 달 전 정전협정(1953년 7월 27일)이 체결됐지만, 파병 유엔군은 여전히 남아서 경계 임무와 훈련을 수행 중이었다. A는 기체 결함으로 상공 약 5km 지점에서 비상탈출했지만, 바다로 휩쓸렸다. 해안에서 약 3㎞ 떨어진 지점에서 낙하산만 발견됐고, A는 KIA(Killed in Action, 작전 중 사망자)로 기록됐다.

벌써 72년 전 사라진 A의 흔적을 찾는 건 사실 ‘미션 임파서블’이라는 걸 국유단도 알고 있다. 하지만 고파도 작전에 투입된 이들은 1%의 가능성이라도 기대를 놓지 않겠다는 각오다. 모든 게 낯설었을 타국에서 24살 인생을 바친 아프리카의 선열에 못다 한 예우를 이제라도 해야 한다는 것이다. 국유단은 공관을 통해 남아공에서 A 유족의 신원을 파악하고, 유전자 채취를 시도하고 있다.

김 병장은 “다시 와서 작전을 펼친다고 결과를 장담할 수 있는 장소가 아닌 만큼 유해가 나오지 않더라도 최선을 다해야 후회가 없다”며 “그게 우리 군이 해야 할 도리”라고 말했다.

미국 역시 고파도 작전에 관심을 보이고 있다. 발굴 착수 다음 날인 지난달 25일 DPAA 관계자들은 직접 고파도 현장을 찾아 현장을 둘러봤다. 미군 유해 발굴도 아닌데 DPAA가 현장을 방문하는 건 이례적으로 여겨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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