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춘을 쏟아부은 직장에 사표를 냈다. 고향인 경북 경산에서 사과 농사를 지을 요량이었다. 아버지가 평생 그랬던 것처럼. 하지만 옛 동료 네댓 명이 ‘용팔이 형님’을 가만두지 않았다. “15년 동안 쌓아온 내공(기술)이 억울하지 않으냐”고 따지듯 물었다. 회사를 차리자고 채근했다.
고심 끝에 서울 가는 짐을 쌌다. 고속도로에서 작명(作名)을 했다. 당시 반도체와 액정표시장치(LCD) 장비 분야에서 세계 최고로 통하던 일본의 다이닛폰스크린이 떠올랐다. 이 회사의 영어 표기가 ‘DNS’였다.
“이왕 사업을 시작하니까 나중에는 DNS를 뛰어넘고 싶다는 바람이었지요. 그만큼 소재·장비 분야에서 일본 기업에 대한 의존도가 높았어요. 사명에 ‘N’보다 알파벳 순서가 앞선 ‘M’을 넣었어요. (웃음) 그래서 DMS입니다.”
한 달 내내 퇴근 안 하고 일하던 악바리
1999년 7월, 세계 1위 디스플레이 세정 장비 업체 DMS는 이렇게 탄생했다. 박용석(66) DMS 대표는 “처음부터 LCD 장비 쪽으로 사업 방향을 잡았다”고 말했다. 배경이 있었다. ‘박용석 사단’은 자타가 공인하는 디스플레이 분야 1세대. 그는 1984년 LG그룹에 입사해 15년 내내 ‘디스플레이 외길’을 걸었다. LCD부터 플라스마디스플레이패널(PDP), 그 사촌 격인 태양전지 분야에서 기술 분석과 공정 개발 등을 맡았다.
누구보다 치열하게 일했다. 사내에서 ‘용팔이 형님’으로 불렸다. 맞다, 그 조직 폭력배 용팔이다. 거칠게 폭력을 써서 붙은 별명이 아니라 일하는 방식이 지독해서다. 바라던 성과가 나오기 전까지는 퇴근할 줄 몰랐다. 한 달 내내 연구소에서 먹고 잔 적도 있다. 후배들에게도 “단내나도록 일해야 한다”고 독려했다.
“LCD 연구는 우면동(LG중앙연구소)에서 3~4명으로 시작했어요. 이게 10여 명, 나중에 400명으로 불어났습니다. 공장에서 실질적인 사업화로 이어지려면 초기 연구부터 긴장해야 해요. 한순간의 의사결정 때문에 막대한 손실을 볼 수 있거든요. 더욱이 LCD는 철강이나 조선, 자동차 등과는 달리 선진 기업의 기술 도입 없이 오로지 우리 스스로 힘으로 세계 정상에 올랐던 사례입니다.”
봉급쟁이로 15년, 창업해서 25년- 올해로 그의 ‘디스플레이 인생’은 꼭 40년이 됐다. 독립할 때 생각은 단순했다. 짜장면(완제품)은 LG가 팔지만, 우리는 밀가루(부품`장비)를 잘 만들면 승산이 있다-. DMS는 디스플레이 세정 분야에서 새 역사를 썼다. 물론 일본 DNS를 따돌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