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옥에서 벗어날 용기

2025-01-23

희망의 조짐과 절망의 조짐이 교차하는 나날이다. 역대 최대 규모라는 LA 산불은 사람들이 애써 일군 삶의 터전을 초토화시킨 채 여전히 진행 중이다. 기후위기가 초래할 지구적 재앙의 서곡인가 싶어 아뜩해진다. 그 혼란의 와중에도 빈집에 들어가 약탈을 감행하는 일이 도처에서 벌어졌고, 약탈자 가운데는 소방관의 복장까지 갖춰 입은 이들도 있다 한다. 상처에 소금을 뿌리는 격이다. 재난 속에 피어나는 인정의 꽃도 있다. 기쁨은 개별적이지만 고통은 보편적이다. 많은 자원봉사자가 어려움을 겪는 이들을 돕기 위해 나서고 있다. 미국의 작가 리베카 솔닛은 ‘대재난 속에서 피어나는 혁명적 공동체에 대한 정치사회적 탐사’라는 부제가 붙은 책 <이 폐허를 응시하라>에서 “자연이 한번 손을 대면 전 세계가 친구가 된다”고 말한다. 타자의 슬픔과 고통을 덜어주려는 마음이야말로 분열된 세상의 치유제가 아닐까?

15개월간 지속된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무장정파 하마스 사이의 전쟁이 잠정적 휴전 상태에 돌입했다. 인질과 포로 교환 등 세부적 절차가 남아 있지만 그나마 다행이 아닐 수 없다. 언론은 전쟁으로 인해 죽거나 다친 이들의 숫자를 나열하지만, 그들은 숫자로 환원될 수 없는 고귀한 생명이다. 그 생명을 파괴하고 죽일 수 있는 권한은 누구에게도 주어지지 않았다. 광대하고 광막한 우주에서 생명의 탄생과 성장과 죽음이라는 드라마가 전개되는 지구란 행성에 초대받은 모든 생명은 고귀하다.

대통령의 구속영장이 발부된 서부지법에서 벌어진 난동 사태는 충격적이다. 법치주의의 근간을 뒤흔드는 사건일 뿐만 아니라 우리 사회 토대 자체를 허무는 사건이기 때문이다. 정치적 과격주의가 도를 넘었다. 넘어선 안 되는 선을 넘은 것이다. 과거 군사정부 시절, 무도한 권력에 저항하던 이들이 찾는 마지막 도피처는 명동성당이었다. 공권력은 그곳에 숨어든 이들을 끌어내기 위해 함부로 진입하지 않았다. 보이지 않는 경계를 지키는 것이 사회의 안정을 위해 필요한 일이라 여겼기 때문이다. 그 무언의 약속이 무너지는 순간 세상은 전쟁터로 변한다. 옛날에는 아기가 태어난 집 대문이나 현관에 금줄을 쳐놓았다. 사내아이가 태어나면 두 가닥으로 꼰 새끼줄에 숯덩이와 빨간 고추를, 여자아이가 태어나면 작은 생솔가지와 숯덩이를 꽂았다. 금줄을 보면 방문자들은 태어난 아기를 축복하며 발길을 돌렸다.

근본주의자들은 세상을 이분법적으로 인식한다. 선과 악, 빛과 어둠, 아름다움과 추함, 거룩한 것과 속된 것이 날카롭게 대립할 뿐 그 사이는 인정되지 않는다. 무수히 많은 중간을 허용하지 않는 배중률이 작동되지 않는 세계는 위험하다. 근본주의자들은 모호함을 못 견딘다. 머뭇거림은 악덕이다. 이 과도한 열정이 종교적 외피를 입으면 상황은 훨씬 심각해진다. 자기들의 행위를 신의 뜻이라 여기기 때문이다. 신의 뜻에 어긋나는 이들을 제거하는 일은 숭고하다고 여긴다. 여당의 한 유력한 정치인은 난동에 가담한 이들을 일러 거룩한 전쟁에 참여한 ‘아스팔트 십자군’이라 칭했다. 그는 십자군 전쟁이라는 기독교 역사의 오점을 자랑스럽게 호명하고 있다. 과격 시위자들의 행동을 부추기기 위한 수사라곤 하지만 그 표현 속에 내재한 피비린내를 그는 짐짓 외면하고 있다.

세상의 소란스러움에 지칠 때마다 칠레 시인 파블로 네루다의 시 ‘침묵 속에서’를 떠올린다. “이제 열둘을 세면/ 우리 모두 침묵하자.// 잠깐 동안만 지구 위에 서서/ 어떤 언어로도 말하지 말자.// 우리 단 일 초만이라도 멈추어/ 손도 움직이지 말자.” 시인은 “그렇게 하면 아주 색다른 순간이 될 것”이라고 말한다. 대한에서 입춘으로 이행하는 이 계절에 뜨겁게 달아오른 마음을 식히기 위해 잠시 멈출 수 없을까? 절망의 조짐을 희망의 조짐으로 전환시킬 수는 없는 것일까? 영성가인 토머스 머튼은 “지옥은 사람들이 서로 미워하는 것 외에는 아무런 공통점도 없고 서로를 떠날 수도 없으며 그들로부터 떠날 수 없는 곳”이라고 말했다. 지옥에서 벗어날 용기가 절실히 필요한 시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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