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향갑의 난독일기] 연필이 운다

2025-01-23

허망함의 깊이는 측정할 수 없다.

죽음 너머는 불가해(不可解)의 영역이다. 삶에 발 딛고 죽음과 결별하는 마지막 절차가 장례다. 죽음을 경험하지 못한 사람끼리 죽음의 아픔을 나누는 것처럼 민망한 일이 또 있을까. 고인(故人)의 영정(影幀) 앞에 조아리며 절을 할 때면 나도 모르게 휘청거린다. 망자의 얼굴을 쏙 빼닮은 자식을 보고 있자면, 작별할 준비가 되어 있지 못한 내가 당혹스럽다. 이리도 쉽게 화르르 태워지고 사라지는 것이 한 사람의 역사일 수 있을까. 빈소를 걸어 나올 때면, 그래도 살아남아야 하는 현실이 흔들리는 넥타이 같아서 아찔하다. 진이 빠진다.

길을 잃은 세상에는 내일이 없다.

나는 더 이상 믿지 않는다. 꽃보다 아름다운 게 사람이라고? 한때, 그렇게 믿었던 내가 안쓰럽다. 짐승보다 못한 사람도 사람일 수 있을까. 광기로 번뜩이는 눈동자가 지워지지 않아서 이 겨울은 내내 불면이다. 귀를 여는 것조차 겁이 난다. 제주항공 참사 유가족을 조롱하고, 추모를 가장하여 구호품을 싹쓸이하는 그들도 사람이랄 수 있을까. 그것도 모자라 제주항공 참사를 “하나님이 사탄에게 허락한 것”이라 말하는 목회자는 또 어떠한가. 그런 목회자를 최고사령관이라 추앙하는 정치 모리배를 보면 나도 모르게 진절머리가 난다. 진이 빠진다.

밑바닥으로부터 길어 올린 생각에는 얼굴이 없다.

나이도 이름도 주소도 없다. 행방이 불분명한 무국적자처럼 소문만 무성하고 실체가 없다. 실체도 없이 꿈틀거리는 생각에 문자와 기호로 숨을 불어넣는 것처럼 가뭇없는 일이 또 있을까. 단어로 콧대를 세우고 문장으로 눈썹을 그리다 보면 나도 모르게 애가 탄다. 이 얼굴이 맞나? 집 나가 소식 끊긴 소녀와, 일이 없어 고시원에 틀어박힌 소년과, 빚 독촉에 핸드폰을 꺼버린 사람들. 맞나, 얼굴이? 문장 하나를 일으켜 새롭게 얼굴을 그릴 때마다 그 생김새가 나와 닮아서 애가 탄다. 진이 빠진다.

하늘에 대고 외치는 기도에는 사람이 없다.

사람은 없고 적의만 일렁이는 간절함. 그들의 간절함은 깃발 되어 거리에 가득한데, 가득함으로 충만한 신은 어느 나라 백성의 신인 걸까. 나는 민망해서 차마 땅을 내려다보지 못하고 눈을 감고 만다. 이 나라는 어떤 백성의 나라이고, 저들은 어떤 나라의 백성인가. 광화문 거리에 흔들리는 성조기를 보고 있자면, 나는 나라를 빼앗긴 식민지 백성이 되어 고개를 떨구고 만다.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 빼앗긴 들에도 옳음이 여물고 어둠은 빛에 밀려 사라지는가. 이따위를 기도라고 읊조릴 때마다 조아리는 내가 안쓰러워서 속이 탄다. 진이 빠진다.

그래도 꿈꿔야 하는 건지 자신이 없다.

‘없음’을 ‘있음’으로 바꾸는 건 기적이다. 보는 것만으로도 가슴 뭉클한 기적. 기적은 멀리 있지 않다. 은박지를 덮고 눈발을 버티는 그대들. 응원봉을 들어 어둠을 밀어내는 너희들. 36.5도의 체온으로 내란(內亂)의 얼음장을 녹이는 당신들. 그대와 너희와 당신이 있어 나는 기적처럼 꿈을 꾼다. 연필을 깎고 까만 연필심에 촛불을 당긴다. 부디 이 한 줌 불빛이 온기가 될 수 있기를. 오늘도 어김없이 차디찬 아스팔트에서 기적을 일으키고 있을 그대와 너희와 당신에게 따스한 입김일 수 있기를. 간절한 심정으로 글을 쓴다. 연필이 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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