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양성이 아름다운 것은 인간이 그것을 아름답게 받아들이고 또 그렇게 만들어가기 때문이다
인간이 성공적으로 문명을 이루고 발전시켜온 것도 나와 다른 사람들을 차별하지 않고 포용하고
때로는 양보하고 타협하며 서로 협력함으로써 가능해졌다
이렇게 인간은 생물학적 다양성의 ‘비극’을 ‘선’으로 승화할 수 있는 잠재력이 있다
MBTI와 같은 성격검사는 항상 사람들의 흥미를 유발한다. 우리 연구실 학생들도 서로의 MBTI 결과를 다 알고 있다. INTJ가 가장 과학자와 어울린다고 하지만 그렇다고 카이스트가 INTJ의 소굴인 것은 결코 아니다. 매우 다양한 유형들이 모여 있다. 가끔 필자가 MBTI 검사를 해서 과학자 유형만 연구실에 받겠다고 심각한 얼굴로 이야기해도 진지하게 듣는 학생은 하나도 없다. 하지만 심리학계에서는 MBTI도 인간의 다양성을 정확하게 반영하지 못한다고 보며 ‘성격 5요인 이론’을 주로 사용한다. 이 이론에서 사용되는 외향성 지표의 경우 WSCD2나 PCDH15 같은 유전자와의 연관성이 ‘네이처 유전학’에 발표된 바 있다.
다양성은 인류가 쌓아올린 문명의 근간이다. 다양한 능력과 적성과 취향과 관심사를 가진 사람들이 모여 협력하지 않고서는 지금과 같이 진보한 문명과 고도의 문화를 만들 수 없었을 것이다. 연구도 마찬가지다. 필자도 참여한 암유전체 분석 논문에는 전 세계 수백명의 저자가 올라가 있어서 단어찾기 기능을 사용하지 않으면 자기 이름을 찾기도 힘들다. 암유전체학이라는 이 특정한 분야 하나에도 임상의사뿐 아니라 분자생물학, 병리학, 종양학, 면역학, 통계학, 전산학, 기계공학, 전자공학 등 다양한 분야의 전문가가 필요하다.
문명이 아닌 자연 속의 다양성은 어떨까? 최근 많은 관심을 받고 있는 생물 다양성 역시 생태계를 이루는 기반이 된다. 그런데 이 다양성의 과학적 배경은 자세히 들여다볼 필요가 있다. 지구상에 최초의 생명이 탄생한 35억년 전부터 지금까지 모든 생명체는 가혹하고 불안정한 환경에서 살아왔다. 이러한 환경에서 부족한 자원을 DNA 교정과 복구에 투자하며 자신과 유전학적으로 동일한 자손을 만들면서 천천히 번식하는 개체군은 끝까지 대를 이어갈 가능성이 극히 희박했을 것이다. 반대로 에너지와 자원을 DNA 교정이 아닌 DNA 복제와 번식에 집중시킴으로써 유전학적으로 저마다 다른 다양한 자손을 빠른 속도로 만들어내는 전략이 성공했던 것이다.
이러한 전략은 세균과 같은 단세포 생물들에서부터 관찰된다. 일부 DNA 복구 유전자가 고장난 결과로 많은 변이를 발생시키며 번식하는 개체군들이 자연에 존재하는데, 이들은 특히 적대적이며 요동치는 환경에 적응하는 데 있어 상당한 이점을 가진다는 것이 밝혀졌다. 이것은 의학적으로도 중요한 의미를 갖는데, 병원균들이 항생제에 대한 내성을 이러한 방식으로 발달시킬 수 있기 때문이다. 즉 수많은 변이 중 하나가 우연치 않게 약에 대해 저항성을 가지게 되면 그 변이가 살아남아 그 개체군의 명맥을 유지하는 것이다. 또한 ‘사이언스’에 보고된 연구에 따르면 한때 50억마리의 개체수를 자랑하던 여행비둘기가 불과 30여년 만에 수수께끼처럼 멸종한 것은 바로 진화 과정에서 유전적 다양성이 지나치게 낮아진 데 그 원인이 있었다.
인간이 가진 유전자 중 가장 다양한 변이를 가지고 있는 것은 MHC인데, 이들은 몸속에 침투한 각종 병원균의 항원을 우리 몸의 면역 시스템에 신고하는 역할을 한다. 그런데 사람마다 다른 MHC 변이를 가지고 있고, 그 변이의 형태에 따라 보다 잘 감지할 수 있는 항원의 종류, 즉 잘 대응할 수 있는 병원균의 종류가 다르다. 수많은 다른 종류의 병원균이 창궐하는 위험한 환경에서 특정 MHC를 가진 사람이라도 살아남아 인류가 멸종을 피할 수 있었던 이유 중 하나다. 그러므로 MHC의 다양성은 인류가 경험한 가혹한 환경과 그로 인한 수많은 죽음을 암시한다. 게다가 이것은 장기이식을 매우 어렵게 만든다. 이식된 장기가 타자로 인식되어 면역시스템에 의해 파괴되는 것은 바로 MHC가 사람마다 다르기 때문이다.
생물학적 다양성의 비극은 인간이 가정을 꾸리고 유지하는 과정에서도 나타난다. 가혹한 환경 속에서 살던 인간의 조상들은 여러 명의 자식을 낳고 선별하는 과정을 통해 자기 유전자의 번식 성공률을 높이고자 했다. 이러한 선별적 투자 전략이 효과적으로 작동하기 위해서는 일단 자식들이 유전적으로 다양해야만 한다. 비슷한 아이들이 태어나는 경우 선택에 큰 의미가 없기 때문이다. 이것이 유성생식이 필요한 이유다. 우리 몸을 구성하는 체세포들은 아버지와 어머니로부터 온 유전자 한 쌍씩을 가지고 있다. 그런데 정자나 난자와 같은 생식세포를 만들 때는 이 중 하나만을 선택해야만 수정이 이루어졌을 때 다시 한 쌍이라는 정상적인 개수를 유지할 수 있게 된다. 이 과정에서 유전자 재조합이 일어난다.
예를 들어 어떤 개체가 A1, A2라는 한 쌍의 유전자와 B1, B2라는 한 쌍의 유전자를 가지고 있다고 하자. A1과 A2는 같은 기능을 하지만 특성이 다른 두 개의 버전이며 B1과 B2 역시 마찬가지로서 유전학에서는 이들을 변이라고 표현한다. 이 개체가 생식세포를 만들 때마다 A1과 A2 중 하나가 무작위로 선택되고 마찬가지로 B1과 B2 중 하나가 선택되므로, 예를 들면 첫째 아이는 A1, B1, 둘째는 A1, B2, 셋째는 A2, B1, 넷째는 A2, B2 등 서로 다른 조합이 가능해진다. 이렇게 되면 여러가지 상황 속에서 하나의 아이라도 살아남을 가능성이 높아진다. 예를 들어 B가 MHC와 같은 면역 유전자라고 하면, 어떤 병원균이 유행하는 환경에서 B1을 가진 아이가 병에 걸려 시름시름 앓는다면 부모는 빠르게 그 아이를 포기하고 B2를 물려받은 아이를 선택할 수 있다. 놀라운 것은, 이런 염색체 재조합은 세포가 의도적으로 DNA 손상을 일으킨 다음 이것을 복구시키는 과정에서 생긴다는 점이다. 생식세포에서 의도적으로 DNA 손상을 일으킬 정도로 유전적 다양성을 확보하는 게 중요한 문제라는 것이다.
이렇게 후손의 다양성을 늘리는 유성생식 전략은 짝을 선택할 때도 작동한다. 위에 설명한 A1, A2와 B1, B2를 가지고 있는 개체의 입장에서는 똑같은 변이를 가지고 있는 상대보다는 각 유전자의 다른 버전을 가지고 있는 상대가 더 매력적인 선택지가 된다. B가 MHC와 같이 병원균에 대한 면역력을 제공하는 유전자라고 하였으므로, 가급적 많은 종류의 병원균에 대비해 다양한 후손을 낳아두고 싶다면, 똑같이 B1, B2를 가지고 있는 상대보다는 B3, B4를 가지고 있는 상대와 결합하는 것이 유리하다.
눈으로 확인할 수도 없는 유전자의 변이에 따라 짝짓기 상대를 선택한다는 것이 언뜻 믿어지지 않지만, 이 현상은 일찍이 쥐와 같은 실험동물에서 여러 차례 관찰되었다. 이는 MHC가 유전학적으로나 단백질 수준에서 페로몬과 연결되어 있기 때문일 것이다. 쥐의 페로몬은 특히 소변에 많이 포함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심지어 현대인들도 체취를 통해 MHC 변이에 대한 선호도를 달리한다는 것이 알려져 있다. 다행히 소변을 통해서는 아니다. 클라우스 베데킨트의 유명한 실험에서, 남성들이 이틀 동안 입고 있던 티셔츠의 냄새를 여성들이 맡고 선호도를 측정해보니 자신과 다른 MHC 변이를 가진 참가자의 냄새를 더 선호했으며 이 경우 과거나 현재 파트너의 냄새와 유사하다고 느끼는 것으로 나타났다. 실제로 이미 결혼한 남녀 쌍들의 MHC 변이를 조사해보면 자신과 다른 MHC 변이를 가진 커플이 많다는 사실도 미국 인간유전학회 학술지에 발표된 바 있다.
연애 상대나 배우자를 선택하는 과정에서 반대 성향에 이끌리는 심리 역시 유전적 다양성을 극대화하기 위한 선호 메커니즘의 하나일 수 있다. 물론 비슷한 점이 매력이 된다는 조사 결과들도 많은데, 이와 같이 비슷한 사람끼리 짝을 맺는다는 ‘동류교배(assortative mating)’의 흥미로운 점은 대개 외모와 같은 물리적 조건에 대해 주로 일어난다는 것이다. 유전학적으로 ‘동류교배’를 조사한 ‘네이처 인간행동’ 연구를 보면 결국 키, 체질량지수(BMI), 그리고 교육성취도와 같은 형질들에서 이런 짝짓기 양상이 나타남을 알 수 있다. 이것은 개개인의 기호에 따라 달라지는 것이 아니라 모든 사람이 선호하는, 즉 우수한 유전학적 자질을 나타내는 형질들의 경우 결국 비슷한 사람끼리 결합하게 되므로 이것이 ‘동류교배’처럼 보인다는 이론을 뒷받침한다. 또한 유전자보다는 문화적 영향하에 있는, 즉 가치관이나 취향 같은 부분에서도 서로 비슷한 점을 찾으려는 경향이 나타날 것이다.
이에 비해 유전자와의 연결고리가 강하면서도 어느 쪽이 확실히 우수하다고 할 수 없는 타고난 성향에 있어서는 차이점이 매력을 유발할 수 있다. 내향성과 외향성, 순종적인 성향과 지배적인 성향이 그런 예가 될 것이다. 실제 조사 결과들이 이를 뒷받침하는데, 흥미로운 가설 중 하나는 자신의 심리적 불안에 대한 방어기제와 상반되는 방어기제를 가진 사람을 필요로 한다는 것이다. 그 심리학적 기제가 무엇이든 간에 다른 성향에게 이끌리는 것은 유전학적인 차이를 극대화하기 위한 유전자의 유도 전략일 가능성이 있다. 실제로 인간의 유전체 전체를 조사하여 배우자 선택에 영향을 미치는 유전자를 찾아보면 MHC뿐만 아니라 많은 다른 유전자들에서 ‘이류교배(disassortative mating)’, 즉 자신과 다른 변이를 찾으려는 경향이 발견된다.
하지만 사랑이라는 화학적 충동과 유전학적 차이점에 대한 매력에 이끌려 결혼을 하고 나면, 언제 그랬냐는 듯 뜨거웠던 감정은 식고 서로의 차이가 부각되기 시작한다. 가뜩이나 서로 너무나 다르게 진화한 남녀가 결혼이라는 제도하에 개인적인 차이를 가지고 평생 부대끼다 보면 극복하기 힘든 갈등이 불거지는 것은 당연하다. 그러나 유전자의 성공적인 번식 외에 개체의 행복한 삶은 자연선택의 고려 대상이 아니다. 따라서 진화의 세계에서 오직 생물학적으로 다양한 후손을 남기기만 할 수 있다면 부부의 삶과 행복은 유전자의 입장에서는 전혀 중요하지 않았던 것이다. 이런 생물학적 배경을 알고 나면 이혼 사유로 가장 많이 제기되는 원인이 ‘성격 차이’라는 것은 놀랍지도 않다. 고 이선균씨와 정유미씨가 주연인 스릴러 <잠>은 결혼관계의 근본적인 문제들은 이성과 의지의 통제를 벗어나는 무의식적 자아에서 비롯된다는 것을 몽유병을 통해 소름끼치게 묘사한다.
생명의 다양성을 보존하는 것은 생태계의 유지 차원에서 매우 중요하지만, 그렇다고 다양성 그 자체를 선(善)이라고 볼 수는 없다. 이렇게 어마어마한 생물 다양성이 존재한다는 것은 역설적으로 자연이 얼마나 생명체가 살기 어려운 적대적인 환경이었는지를 말해주는 방증이다. 다양성이란 그 안에서 경쟁을 통해 살아남기 위한 유전자들의 냉혹하고 이기적인 전략의 결과다. 다양성이 아름다운 것은 인간이 그것을 아름답게 받아들이고 또 그렇게 만들어가기 때문이다. 인간이 성공적으로 문명을 이루고 발전시켜온 것도 나와 다른 사람들을 차별하지 않고 포용하고 때로는 양보하고 타협하며 서로 협력함으로써 가능해졌다. 이렇게 인간은 생물학적 다양성의 비극을 선으로 승화할 수 있는 잠재력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