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괜히 마음이 울적할 때 나는, 예전 가요를 찾아 듣는다. 사는 게 바쁘다 보니, 제목을 일일이 기억하기 번거롭기도 하고, 그냥 그런 느낌의 노래, 그러니까 그날의 온도와 습도, 기분과 밀도에 적정한 분위기의 노래가 듣고 싶다. 제목이 뚜렷이 기억나는 그 노래가 아니라, 적당히 지금 기분을 닮은 노래를. 봄이 되면 ‘봄에 듣기 좋은 노래’, 비가 오면 ‘비 오는 날 듣기 좋은 노래’를 검색한다. 곧 날이 더워질 터이니 ‘여름에 듣기 좋은 노래’를 찾아 듣겠지. 우아한 사람이 되고 싶어서 애써 클래식을 찾아 듣던 허세로운 세월도 지났고, 85년생에게는 조용하고 촉촉한 90년대 발라드가 제격이다.
유튜브 검색창을 켜고 ‘90년대 발라드’, ‘조용한 발라드’, ‘비 오는 날 듣기 좋은 발라드’라고 검색하면 그 시절의 나로 안내해 줄 감성적인 발라드를 모은 영상들이 검색된다. 오늘은 어떤 노래들을 들을까, 검색하다가 알고리즘이 ‘옛날 발라드’라는 영상을 찾아 주었다. 클릭해 보니 내가 좋아하는 노래들이 모여 있어 소소한 흡족함이 몰려왔다. 신나는 것도 잠시, 그런데 옛날이라니, 내가 좋아하는 노래가 옛날 노래라니. 나의 청춘이었던 그 시절이 옛날이라니.
울산에서 공업탑 근처에 있던 중학교를 다녔던 그 시절의 나는, 교복을 입고 도시락을 싸서(정확히는 엄마가 싸서 가방에 넣어준 도시락이 든 가방만 메고) 버스 타고 등교했다. 개인 사물함이 있어서 책은 거기에 보관했고, 가방 안에는 도시락이 전부인 때도 많았다. 교복 치마를 줄여 입는 게 이쁜 줄 알았고, 이쁘고 싶었고, 이쁘게 보이고 싶었다. 겨울에는 발 토시가 유행했었는데, 학생 주임 선생님을 피하기 위해 새벽같이 등교하기도 했다. 발 토시를 뺏기지 않을 방법은 그게 유일했고 뺏길 때마다 다시 사기에는 용돈이 부족했지만, 에너지는 넘쳤다. 수업 시간에 책을 세워두고 그 속에 머리를 넣은 채 잠을 잤으며, 그건 일말의 어린 양심이었다. 친구들과 복도 바닥에 앉아 도시락을 까먹고 선생님들께 이래저래 야단맞던 기억이 있다. 이유가 정확히 기억나진 않지만 아마 내가 혼날 짓을 했을 거다. 수업이 끝나면 공업탑까지 걸어 내려와 템포를 한 바퀴 돌고 펜과 메모지를 사는 것이 정말 즐겁고 행복했다. 에스컬레이터 타러 시내에 놀러 가는 날을 손꼽아 기다린 기억도 있다. 그렇게 소박한 소망이라니.
그 시절의 노래를 들으면 자연스럽게 흥얼거리며 따라 부르게 된다. 학원 차에서 친구들과 떼창을 하기도 했으며, 연애할 땐 노래방에서 가사에 감성을 담아 불렀다. 김건모의 ‘잘못된 만남’, 조성모의 ‘투해븐’, 왁스의 ‘화장을 고치고’까지. 지금도 멜로디와 가사가 모두 기억나고 처음부터 끝까지 부를 수 있다. 내가 이렇게 기억력이 좋은 사람이라니, 새삼 놀랍다. 찌질하고 감정적이며 미련이 잔뜩 들어간 가사의 노래를 좋아했는데, 그 노래들은 어쩌면 앞으로 내가 찌질하고 감정적이며 미련을 잔뜩 남기는 연애를 하며, 사랑 앞에 비참해질 것이라는 예언이었는지도 모르겠다. 그 시절의 상처와 눈물들이 담보되어 지금의 행복을 받쳐주고 있다고 생각하면 괜히 눈물이 핑 돌기도 한다.
그러하지만 그 시절의 내가 좋아서, 추억과 기억이 좋아서, 그래서 우리 동네가 좋고 울산이 좋아서, 나는 다른 지역에 가서 살고 싶다는 꿈을 꾼 적 없다. 등교와 출근, 하교와 퇴근이 헷갈리는 어른이 되어버렸지만, 여전히 시절을 머금고 있는 공업탑과 도로, 학교 앞의 육교와 담장들. 친구들과 함께 걸었던 길들이 참 좋다. 무려 삼십 년 이상을 기억할 수 있는 미친 기억력이 내가 가진 유일한 초능력이지 않을까.
돌아보면 그저, 혼자 사랑하고 혼자 헤어지고 혼자 미련을 남긴 채 상처받는 1인극을 하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그 시절을 함께 했던 사람들은 각각 자신의 삶을 찾아 떠나고 나만 혼자 덩그러니. 산다는 건 정말 원맨쇼이고 쌩쇼이면서, 결국은 허탈하게 웃으며 채널을 돌리고 말 코미디 같다. 나이가 들수록 낯선 곳들이 어색해서 다른 지역에서의 삶은 상상되지 않는데, 앞으로 더더욱 그러하겠지. 추억과 기억이 있는 곳에서, 기억하고 추억하며 오롯이 살아가야겠다. 내가 사랑을 했던 모든 사람을 가득히 사랑하면서.
김현주 울산 청년 작가 커뮤니티 W 자문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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