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난향의 ‘명월관’
이난향의 ‘명월관’ 디지털 에디션
더중앙플러스는 ‘남기고 싶은 이야기- 명월관’의 디지털 에디션을 연재합니다. 일제강점기 조선 최고의 기생으로 손꼽혔던 이난향(1901~79)이 1970년 12월 25일부터 이듬해 1월 21일까지 중앙일보에 남긴 글입니다. 기생이 직접 남긴 기생의 역사이자 저잣거리의 풍속사, 독립투사부터 친일파까지 명월관을 드나들던 유력 인사들이 뒤얽힌 구한말 격동의 기록이기도 합니다. 당시의 기록 중 팩트가 명확지 않아 후대에 입증되거나 반박된 부분, 여러 등장인물과 사건에 대한 설명을 추가하고 재구성해 더욱 풍부한 스토리로 다듬었습니다.
제4화. 의친왕부터 이완용까지, 명월관에 드나든 거물
내가 만난 초기의 명월관 손님들은 조정의 높은 벼슬을 지녔거나 현직 벼슬을 갖고 있는 사람 등 대감이라 불러야 하는 신분이 높은 분들이었다.
제일 높은 신분이었던 어른은 의친왕 이강공. 평양감사를 지냈고 후에 이왕직장관을 지낸 민병석, 순정효왕후 윤씨의 아버지이신 윤택영 부원군, 철종의 사위이며 개화파의 기수였던 박영효, 민충정공의 아우 되신 민영찬 대감, 조 대비의 조카 되는 조남승, 참판을 지낸 구용산, 친일파 거두 이완용·송병준·이지용, 이름 높은 화가 김용진 등 당대의 거물급은 거의 모두 드나들었다.
이들 인사들과 만나는 것은 이분들이 명월관에 찾아와 부르시는 경우와 토요회 구성원들이 사랑놀음에 부르는 경우였다. 사랑놀음이란 명사들이 자기 집에서 연회를 베풀고 기생을 부르는 것이다. 나는 이 두 곳에 참석하면서 세상 돌아가는 형편과 사람 됨됨을 옆에서 듣고 보고 할 수 있었다.
이들은 지체가 높은 분들이라 기생들은 이들과 합석할 때 무척 신경을 써야 했다. 의친왕 앞에 나아갈 때에는 “문안 아룁니다.” 이렇게 인사를 올려야 했고, 대감들 앞에 나갈 때는 “문안 어떱쇼”라고 문안 인사를 가려 써야 했다. 이뿐 아니라 나를 가리킬 때에도 의친왕 앞에서는 꼭 ‘소인’이라고 해야 했으며, 대감들에게는 ‘제가’라는 식으로 했다.
이처럼 언행에 각별한 주의를 가져야 했기 때문에 늘 긴장해야 했다. 그러나 요즘에는 연석에서 넘나드는 상스러운 언사는 고사하고라도 수틀리면 동석한 여자가 “이 새끼…” 하면서 호통을 치고 점잖은 손님은 오히려 여자의 기분을 맞추어야 한다니 세상은 바뀌고 또 바뀌었다.
명월관에 출입하는 대감들은 인력거를 타고 다녔고, 좌우에는 보호 순사들이 붙어 다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