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전국 어디서 치료받든, 결과는 같아야 한다.”
급성림프모구 백혈병(ALL) 치료의 ‘한국 표준’을 만들자는 데 뜻을 모은 소아암 의사들의 첫걸음은 이렇게 당연하면서도 달성하기 어려운 목표에서 시작됐다. ALL은 국내 소아암 중 가장 흔한 암이다. 매년 250명이 새로 진단받는다. 이전엔 주로 미국 등 선진국의 항암 치료법을 가져다 썼다. 병원마다 항암제 종류, 투약 일정, 검사 기준이 제각각이었고, 같은 병을 앓더라도 치료 결과가 다른 일이 생겼다. 치료법이 다르다 보니 결과를 분석하고 비교하기 쉽지 않았다.
관련 학회가 치료법 통일을 시도했지만, 참여 병원 수가 제한적이었다. 그러던 중 뜻밖의 단비를 만났다. 고(故) 이건희 전 삼성 회장 기부금이다. 이 전 회장 유족이 지난 2021년 소아암ㆍ희귀병 극복에 써 달라고 서울대병원에 기부한 3000억원이 마중물이 됐다. 전국 소아암 명의들이 머리를 맞대고 최신 임상 결과를 분석하고 토론을 벌인 끝에 지난 2023년 9월 한국의 ALL 표준치료법이 마련됐다. ALL 환자들을 표준위험군ㆍ고위험군ㆍ최고위험군ㆍ영아군ㆍ재발군으로 분류해 각각 최적의 치료법을 만들었고, 정부 허가를 거쳐 진료 현장에서 사용하고 있다.
연구의 핵심은 서울-지방의 병원 네트워크다. 서울과 지방 주요 병원의 소아암 명의들이 연구에 참여한다. 전국 병원이 환자의 골수 등 검체를 보내면 전장유전체 분석(WGS) 등 정밀검사를 하고 진단검사 전문가의 해석을 담은 결과지를 보내주는 시스템을 만들었다.
연구에 참여 중인 백희조 화순전남대병원 교수(소아청소년과)는 “환자의 골수로 시행하는 암세포의 유전자 검사 결과는 치료 강도와 방향을 결정하는데 큰 도움이 된다. 훨씬 정밀한 치료가 가능해졌다”라고 말했다. 기존 검사로는 파악할 수 없던 암의 성격을 찾아내 치료 강도를 조정하거나 조혈모세포 이식 여부까지 판단한다. 소아청소년과, 진단검사의학과 등 다양한 진료과의 전문가가 모이는 비대면 콘퍼런스도 연다. 백 교수는 “결과지를 보고 의문 사항이 생길 때 전문가들과 공유하고 토론할 수 있어 큰 도움이 된다”라고 말했다.
그는 “기존 검사에서 표준위험군으로 나왔지만, 유전자 검사에서 고위험군이나 최고위험군으로 확인되는 경우가 있다. 유전적으로 특정 치료 약의 대사 능력이 떨어지는 것으로 나오면 다른 약을 쓸 수도 있다”라고 설명했다. 항암 치료 때마다 1만분의 1개까지 미세하게 남은 암세포를 확인하는 미세잔존암 검사(MRD)도 이뤄졌다. 치료를 얼마나 더 이어갈지 결정하는 데 중요한 검사다.
백 교수는 “현미경으로 골수 속 암세포를 확인하는 기존 검사 방법보다 100배 이상 정밀한 검사”라며 “기부금 덕분에 환자 부담 없이 맞춤형 치료가 가능해졌다”라고 설명했다. 백 교수는 지난해 정부가 시작한 소아암 진료체계구축사업에도 참여 중이다. 그는 “소아암은 환자 수가 적다 보니 지원에서 배제되는 경우가 많다. 우리나라 미래에 대한 투자인 만큼 사회적 배려가 필요하다”라고 강조했다.
표준위험군 연구를 이끄는 주희영 삼성서울병원 교수는 “표준위험군 기준 국내 ALL 환자의 완치율은 90%에 육박하지만, 미국과 비교하면 아직 3~5%포인트 뒤져있다”라고 말했다. 주 교수는 “미국에선 1960년대부터 전국 병원들이 참여하는 표준 치료법 연구를 이어왔고, 소아암 완치율을 획기적으로 끌어올리는 계기가 됐다”라며 “10년간 국내 환자에 같은 치료를 하고 이 데이터를 토대로 치료법을 개선해나가면, 완치율을 세계 최고 수준으로 끌어올릴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