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과 제도가 흔들리면 경제와 희망이 흔들린다

2025-12-09

을사년 한 해가 저문다. 그러나 사계절의 다채로운 풍경과 달리 오늘날 한국의 자화상은 여전히 무채색이다. 시간은 희망찬 새해로 달려가고 있지만 외교, 안보, 경제, 민생 모두 역주행하는 느낌이 짙다. 급변하는 국제 정세 속에서 국가안보는 거센 도전을 받고, 민주제도는 뒷걸음질 치며, 경제정책은 방향을 잃고 표류 중이다. 좌와 우, 진보와 보수로 나뉘어 사회는 끊임없이 대립하지만, 누구를 위한 갈등인지 인식과 방향조차 흐릿해졌다. 대화와 타협으로 문제를 해결해야 할 정치가 도리어 분열과 증오를 조장한다.

사법 시스템 갈등으로 분열 가중

공직자들 기 꺾는 검열·조사까지

제도 바꾸기보다 운영에 힘써야

절제된 권력과 책임 있는 정치를

정치란 타협과 조정을 통해 국가가 지향할 목표를 설정하고 국민을 설득해 함께 나아가는 고난도의 예술이다. 지도자는 선택과 집중을 통해 공통의 가치를 실현해야 한다. 중장기적으로는 저성장 트렌드를 바로잡고 빈부 격차를 해소하여 지속 가능한 성장의 기틀을 마련해야 하며, 단기적으로는 눈덩이처럼 불어난 정부부채·가계부채의 감축과 치솟는 환율의 안정이 시급하다. 국가가 안고 있는 대부분 문제의 근원은 경제요, 먹고사는 문제의 해결이야말로 정부의 가장 기본적이고도 중대한 사명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작금의 현실은 어떤가. 예상되는 위기에 대비하여 국민의 미래를 보장하기보다 권력의 유지와 확산에만 골몰하는 모습이 반복되고 있다. 청년의 자립과 내일을 위한 과감한 투자는 소홀히 하면서 재정은 방만하게 운용한다.

‘노란봉투법’을 둘러싼 극한 대치에서 보듯, 갈등을 조정하고 중재해야 할 정부가 오히려 타협 없는 강 대 강 국면을 방치하고 있다. 권한이 크면 책임도 큰 법이다. 집권세력이 국정 난맥의 가장 무거운 책임을 져야 하는 이유다.

억압적이고 편파적인 특검 수사 방식도 작은 문제가 아닌데, ‘내란 재판부’ 설치 등 사법 시스템을 둘러싼 위헌 시비가 사회적 분열을 가중하고 있다. 또한 정치적 위기가 닥치자 그 화살을 엉뚱하게 공직자들에게 돌리고 있는 건 아닌지 우려스럽다.

‘카톡 검열’ 논란과 공무원 휴대전화 조사는 디지털 시대 기본권 침해라는 새로운 문제로 대두했다. 1990년대까지만 해도 우리 경제는 정부-기업-은행이 일체가 된 ‘한국주식회사’ 체제로 성장한 게 사실이다. 관치금융 같은 부작용도 있었으나, 공무원들의 헌신적 역할은 누구도 부인할 수 없다.

작금의 무리한 조사는 세종시 출범 이후 꺾인 젊은 인재들의 공직 진출 의지를 더욱 약화시킬 것이다. 동료를 감시하고 부조리를 서로 신고하라고 종용하면 가뜩이나 불신이 팽배한 우리 사회를 더 깊은 수렁으로 밀어 넣을 게 자명하다. 지금이라도 중지하기를 바란다.

법과 제도는 민주주의의 안전장치이자 경제발전의 토대다. 국가안보와 산업경쟁력을 지탱해온 시스템을 충분한 합의 없이 흔들고, 사법 질서 자체를 정쟁과 공격의 대상으로 삼는 것은 결코 가벼운 사안이 아니다. 제도를 바꾸기는 쉬워도 한번 훼손된 신뢰를 복원하는 데는 오랜 시간이 걸린다. 우리는 이미 지난해 노벨 경제학상 수상자 대런애스모글루도 인정한 ‘포용적 제도’를 통해 ‘한강의 기적’을 이룩했다. 검증된 제도를 섣불리 바꾸기 위해 국력을 낭비하기보다 이를 안정적이고 정교하게 운용하는 데 국정의 우선순위를 두어야 한다.

민주 제도가 흔들리면 국가도 경제도 동시에 흔들린다. 권력이 소수에 집중된 사회에서는 정의보다 부정부패가 판을 친다. “우리가 권력을 통제하지 않는다면, 권력 남용을 막을 수 없다”는 프리드리히 하이에크의 통찰을 기억해야 한다. 가장 위험한 것은 ‘법이 권력의 수단으로 전락하는 순간’이다. 사법부를 ‘선출된 권력’의 하부조직으로 만들려는 유혹에서 벗어나야 한다. 그 길은 필연적으로 독재로 이어져 국가적 불행으로 귀결되기 때문이다.

여든 야든 그리고 높든 낮든 정치인은 언제든 법의 검증을 받을 자리에 있는 만큼 더 높은 책임성과 도덕성이 요구된다. 그렇기에 정치 과정은 더욱 투명하고 신중하게 운영되어야 하며, 권력 또한 절제 있게 행사되어야 한다. 숨길 수 없는 것이 진실이듯, 권력 또한 영속적일 수 없다. 법을 고쳐서라도 사법적 어려움을 피하려는 시도는 결국 해결책이 될 수 없다. 온갖 위기 속에서도 임기를 성공적으로 마무리한 미국 대통령 빌 클린턴의 사례처럼 경제를 되살리고 민생을 보살피는 데 국정의 역량을 집중해야 한다.

법과 제도는 국가의 뼈대이며 신뢰는 경제의 뿌리다. 지속 가능한 성장은 예측 가능한 경제운용 시스템이 전제돼야 한다. 뼈대와 뿌리가 무너지면 성장도, 희망도 함께 무너진다.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더 많은 선동이나 정쟁이 아니라, 법과 제도를 존중하는 절제된 권력, 그리고 미래를 향한 책임 있는 정치다.

정운찬 동반성장연구소 이사장·전 서울대 총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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