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속도에 적응이 안 되더라고요.” 왜 서울살이를 청산하고 고향으로 돌아왔냐는 질문에 30대 초반의 한 젊은이가 한 대답이다. “그 속도에 맞춰 살려다 보니 스트레스는 심해지고 자존감은 날로 줄어들더군요. 이렇게 살다가는 삶의 지향을 잃은 채 부유할 수밖에 없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너무 늦기 전에 내가 잘할 수 있고 또 보람을 느낄 수 있는 일을 해보자 싶었어요.” 그는 고심 끝에 다니던 직장에 사직서를 제출하고 고향에 돌아와 새로운 인생을 시작했다. 쉽지 않은 결정이었지만 조금도 후회가 없었다. 경쟁에서 밀려나 억지 춘향으로 낙향한 것이 아니기에 비애감에 사로잡히지 않았다. 생텍쥐페리는 삶에는 해결책이 없고 밀고 나가는 힘만 있다고 말했다. 그 힘을 만들어낼 때 해결책이 뒤따라온다는 것이다.
삶의 속도를 늦추자 아름다운 것들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고, 지역사회에서 자기가 할 수 있는 일이 눈에 띄었다. 고향은 그를 따뜻하게 반겨주었다. 서울에서 만난 벗들의 소비 수준을 따라갈 수 없어 자괴감을 느끼곤 하던 다른 친구들도 새로운 삶을 모색하기 위해 하나둘씩 고향으로 돌아왔다. 젊은이들이 부족한 작은 도시였기에 그들을 필요로 하는 일이 제법 많았다. 자신을 절실히 필요로 하는 곳에서, 보람 있는 일을 하고 있어서인지 그들은 유쾌하고 명랑했다. 소비사회의 신민이 되기를 거부하고 자기 삶의 문법을 따라 주체적으로 살아가는 그들이 참 대견했다. 그들은 세상에 희망이 있냐고 묻기보다는 스스로 작은 희망이 되기로 작정한 사람들이다.
미국의 빼어난 에세이스트인 리베카 솔닛은 인생 학교에서 배운 바를 이렇게 요약한다. “주변부가 오히려 가장 풍요로운 장소일 수 있으며 다른 영역들을 드나들기에 유리한 위치일 수 있다는 사실을 배웠다.” 중심에서 밀려날까 봐 노심초사하는 이들은 변화와 불확실성을 수용하려 하지 않는다. 다양하게 반응하지도 못한다. 하지만 주변부는 사방으로 열려 있다. 주변부야말로 새로움의 촉수이다. 역사의 새로움이 늘 변방에서 시작되는 것은 그 때문이다. 중심으로부터 유쾌한 탈주를 감행한 이들이 곳곳에서 새로운 생태계를 만들고 그들의 비전이 연결될 때 세상은 건강해질 것이다.
여러 해 전, 교회 청년 둘이 분쟁지역에 평화를 심는 일을 하기 위해 반다아체와 동티모르로 떠났다. 그들로 하여금 다니던 좋은 직장을 버리고 고난의 현장에 가도록 한 힘은 무엇일까? 세상에 더 이상 속지 않겠다는 결의였을 것이다. 수돗물도 나오지 않기에 우물물을 길어다 취사와 세면을 해야 하는 곳, 휴지조차 구비되지 않은 화장실에 가기 위해 외등 하나 없는 건물 건너편으로 이동해야 하는 불편을 감수해야 하는 곳, 도마뱀·거미·바퀴벌레·개미, 그리고 이름조차 알 수 없는 벌레들과 함께 살아야 하는 곳에 있으면서도 그들은 행복하다고 말했다. 그들의 꿈은 소박하다. 담배와 대마초에 찌들어버린 젊은이들의 몽롱한 눈에 열정의 빛이 돌아오도록 하는 것, 현지인들과 우정을 나누는 사람이 되는 것이다. 멋지지 않은가? 자기 집착에서 벗어나는 순간, 예전에는 상상조차 하지 못한 광활한 삶의 지평이 열린 것이다.
돈이 주인 노릇 하는 세상은 욕망을 확대재생산함으로써 유지된다. 화려한 의상을 입고 우리에게 다가오는 욕망의 본모습은 폐허다. 과도한 욕망은 초조감을 낳고, 초조감은 이웃에 대한 적대감을 낳고, 적대감은 폭력을 낳는다. 폭력은 자기 파괴와 외로움으로 귀착된다. 자기 이익을 추구하는 데 감이 빠른 사람들, 두 길 보기에 익숙한 사람들로 가득 찬 세상은 상상만 해도 끔찍하다. 자기 삶의 자리에서 희망의 공간을 넓혀가는 이들이 있다. 그들은 열대우림이나 식물성 플랑크톤처럼 생태계에 희망의 산소를 공급한다. 다시 한 번 생텍쥐페리의 말을 떠올린다. “오직 방향만이 의미를 지니고 있다. 중요한 것은 도착하는 것이 아니라 어딘가로 향해 가는 것이다.” 스산한 바람이 옷깃을 여미게 하는 이 늦가을, 우리가 지금 어디를 향해 가고 있는지 돌아보아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