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덜란드 헤이그에 있는 국제사법재판소(ICJ)는 유엔 산하 기관이다. 1945년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유엔이 출범할 때 ‘국가 간 다툼을 전쟁 대신 재판으로 해결하면 얼마나 좋을까’라는 인류의 염원 속에 탄생했다. ICJ가 헤이그에 자리잡은 것은 네덜란드가 오래전부터 국제법 연구의 중심지이기 때문이다. 1907년 헤이그에서 세계 여러 나라 대표가 참여한 가운데 ‘만국(萬國)평화회의’가 열렸다. 당시 조선의 고종 황제도 이준 열사를 특사로 보냈다. 국제사회를 상대로 일본의 부당한 국권 침탈을 호소하려던 이 열사의 구상은 ‘조선은 외교권이 없다’라는 이유로 회의 참석을 거부당하며 좌절됐다. 헤이그는 한국인들에겐 나라 잃은 설움을 떠올리게 함과 동시에 부국강병의 의지를 다지게 만드는 도시다.
6·25전쟁 발발 직후 네덜란드는 한국을 돕기 위한 파병을 결정했다. 3년이 조금 넘는 기간 동안 5300여명의 네덜란드 용사들이 한반도에서 싸웠고 그중 124명은 목숨을 잃었다. 흔히 네덜란드를 ‘상대적으로 작은 나라’라고 여기기 쉬우나 6·25 당시 네덜란드군의 파병 규모는 유럽의 강대국이라는 프랑스(3400여명)보다 더 많았다. 네덜란드군 전사자 거의 대부분이 부산 유엔기념공원에 묻혀 여전히 한국 땅을 지키고 있다. 1951년 2월 강원도 횡성 전투 당시 유엔군의 안전한 퇴각에 크게 기여하고 장렬히 산화한 마리누스 덴 오우덴 중령이 대표적이다. 네덜란드군의 용기와 희생을 기려 횡성에 세워진 참전기념비는 한국과 네덜란드의 우정을 상징한다.
1998년 프랑스 월드컵 당시 한국 대표팀의 성적은 실망스러웠다. 조별 리그 1차전 멕시코와의 경기에서 한국은 선제골을 넣었으나 1-3으로 역전패했다. 2차전 네덜란드와의 경기는 0-5의 완패였다. 조별 리그를 통과한 네덜란드가 4강까지 올라간 점을 보면 한국과 전력 차가 상당히 큰 것이 분명했다. 하지만 국민적 분노가 들끓었고 결국 대표팀 차범근 감독은 조별 리그가 진행 중인데도 해임되고 말았다. 당시 한국 축구에 굴욕을 안긴 네덜란드 대표팀을 이끈 이가 바로 거스 히딩크 감독이다. 그 히딩크가 훗날 한국 대표팀 감독으로 부임해 2002년 한·일 월드컵에서 한국 대표팀을 4강에 진출시키는 과정은 한 편의 영화처럼 드라마틱하다. 오늘날 한국인들은 네덜란드 하면 히딩크부터 떠올린다.
12·3 비상계엄 사태와 대통령 탄핵소추 여파로 연초부터 정국이 혼란스러운 가운데 마르틴 보스마 네덜란드 하원의장이 한국을 방문했다. 6일 보스마 의장과 만난 우원식 국회의장은 “네덜란드는 6·25전쟁 파병, 헤이그의 이준 열사 기념관, 히딩크 감독의 월드컵 4강 신화 등으로 우리 국민이 매우 가깝게 느끼는 나라”라고 덕담을 건넸다. 이에 보스마 의장은 한국 민주주의의 위기 국면에서 우 의장이 발휘한 리더십에 찬사를 보내는 것으로 화답했다. 보스마 의장은 8일에는 판문점 공동경비구역(JSA)에 가서 유엔군사령부 데릭 매콜리 부사령관(캐나다 육군 중장)으로부터 한국의 안보 상황에 관한 브리핑을 받았다. 마침 올해 들어 판문점을 찾은 첫 귀빈이 바로 보스마 의장이라고 하니 한국·네덜란드의 인연은 여간 깊은 것이 아니다.
김태훈 논설위원 af103@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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