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사건건 피새를 부리는 이들이 있다. 그들은 성격 탓이려니 하고 그저 웃어 넘겨주기 힘들 만큼 조급하고 날카로워 주변을 불편하게 만든다. 그들은 말과 표정으로 불화를 솟쳐 올린다. 이런 이들을 일러 성경은 ‘자기들의 수치를 거품처럼 뿜어 올리는 거친 바다 물결’이라고 말한다. 이들 속에 오래 머물다 보면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마음이 무거워진다. 즐거운 일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지만 현실은 중력처럼 우리 마음을 아래로 끌어내린다. 자기의 옳음에 대한 과도한 확신에 사로잡힌 이들일수록 다름에 대한 포용력을 발휘하지 못한다. 자기가 세운 기준에 맞지 않으면 가차 없이 비난하고 배척한다. 다면적, 다원적, 유기체적 사고가 멈출 때 세상은 성격들 사이의 전장이 된다. 온기 없는 곳에서 생명은 자라지 못한다. 남극의 황제펭귄들은 알을 발 위에 올려놓고 따뜻한 깃털로 알을 품는다.
아일랜드 작가인 클레어 키건의 <맡겨진 소녀>는 다사로운 세계로 우리를 초대한다. 가난하고 무책임한 부모 밑에서 자라던 소녀는 엄마의 또 다른 임신으로 인해 잠시 친척 집에 맡겨진다. 소녀는 부모로부터 따뜻한 애정 표현이나 정서적 지지를 받아보지 못했다. 천성적으로 낙관적인 소녀는 그런 환경에 짓눌리지 않았다. 낯선 곳으로 가면서도 소녀는 두려움보다는 설렘을 느낀다. 소녀를 맡아준 킨셀라 부부는 얼마 전 큰 슬픔을 겪었지만 서로에 대한 깊은 애정과 신뢰로 슬픔을 극복한 사람들이었다. 어느 날 소녀는 뜨거우면서도 차가운, 겪어본 적 있는 기분(소변 실수)을 느끼며 잠에서 깬다. 나중에 침대 시트를 벗기던 킨셀라 아주머니는 뒤늦게 그 사실을 알아차리지만 소녀를 책망하기는커녕 매트리스가 낡아서 습기 차는 곳에 소녀를 재웠다고 미안해한다. 세제와 뜨거운 물로 매트리스를 문질러 씻은 후 햇볕에 말린 다음 아주머니는 일을 도와준 소녀에게 고맙다면서 함께 베이컨을 먹자고 제안한다.
민망할 수도 있는 상황에서 킨셀라 아주머니가 보여준 따뜻한 배려는 소녀의 존재에 대한 무한한 긍정이었다. 이러한 존중받음의 경험이 누적될 때 좋은 사람이 될 가능성이 늘어난다.
대홍수로 말미암아 세상에서 숨 쉬던 모든 것들이 다 사라진 후 방주에서 나온 노아는 그 참혹한 현실을 견디기가 어려웠던 것일까? 그는 어느 날 포도주에 취해 장막 안에서 벌거벗은 채 쓰러졌다. 당대의 의인이고 흠 없는 사람이라 인정받던 노아의 술 취함, 그리고 벌거벗음은 그가 겪은 내적 고통을 고스란히 보여준다. 아들 함이 먼저 그런 아버지의 모습을 발견하고는 형들에게 달려가 그 사실을 알렸다. 셈과 야벳은 겉옷을 가지고 뒷걸음쳐 들어가 아버지의 벗은 몸을 덮어드렸다. 성경이 굳이 이런 에피소드를 기록한 것은 허물을 드러내 망신을 주곤 하는 각박한 인심에 대한 경고가 아닐까?
자기와 생각과 입장이 다른 이들에게 거침없이 혐오를 드러내는 세상에 평화는 없다. 같음에 대한 과한 집착은 다름이 가져오는 위협보다 더 치명적이다. 정치적 과격주의와 종교적 근본주의의 숙주는 다른 것에 대한 공포와 적대감이다. 모든 파괴적 갈등은 타자의 고통을 상상하지 못하는 무능력에서 비롯된다. 선 자리가 다르면 세상 풍경은 사뭇 다르게 보인다. 타자의 눈에 비친 세상을 받아들일 때 세상에 대한 입체적 이해에 가까워진다. 타자와 공존하기 위한 여백을 마련할 때 창조적 삶이 시작된다. 자기 확신에 사로잡힌 이들일수록 모든 것을 자기 방식대로 통제하려 한다. 통제에 응하지 않거나 저항하는 이들은 모두 적이 된다.
킨셀라 부부는 소녀의 부끄러움을 사랑과 이해의 담요로 덮어줌으로써 소녀에게 자신이 존중받고 있음을 느끼게 했다. 셈과 야벳은 아버지의 벌거벗은 모습을 가려드림으로써 다시 시작할 용기를 북돋웠다. 해나 아렌트는 인간이 행위할 수 있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을 시작할 수 있음을 뜻한다고 말했다. 이 참담한 시대에도 우울에 빠지지 않는 것은 여백을 창조하는 이들이 곳곳에 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