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냉전
오드 아르네 베스타 지음
유강은 옮김
서해문집
우크라이나‧가자 등에서 대결국면이 지속되면서 ‘신냉전’이라는 말이 오르내린다. 트럼프 2.0이 보여주는 변동성과 불확실성 속에 시대를 헤쳐가려면 냉전의 역사에서 지혜를 얻을 필요가 있지 않을까.
노르웨이 출신의 냉전‧동아시아 전문가로 미국 예일대 역사 교수인 지은이는 냉전의 시간적‧공간적 범위에 대한 통념부터 깬다.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1945년부터 베를린 장벽이 무너진 1989년까지 유럽 중심으로 벌어진 미국과 소련의 대결이 냉전이라는 시각에서 벗어나, 거의 100년에 걸쳐 전 지구적으로 이뤄진 세계사 차원의 거대한 흐름으로 영역을 확대한다. 이를 바탕으로 냉전의 경과와 함의를 22개 장면으로 파헤친다.

독특한 점은 냉전 기원을 19세기 후반 경제적‧기술적‧군사적으로 힘을 기른 미국이 1898년 미국-스페인 전쟁 승리로 쿠바‧푸에르토리코‧필리핀‧괌을 차지한 데서 찾는다는 것. 그 뒤 윌리엄 태프트 대통령(1909~1913년 재임)이 해외 투자·대출로 대외 영향력을 확대하는 ‘달러외교’를 펼치며 본격적으로 글로벌 강대국을 지향하기 시작했다(태프트는 전쟁장관 시절인 1905년 미국의 필리핀 지배권과 일본의 대한제국 지배권을 상호 승인하는 가쓰라-태프트 밀약을 맺었다).
미국은 경제적 영향력과 독립혁명을 이끈 공화주의 정신의 전 세계 확산을 동시에 도모했다. 처음에는 주저하다 결국 1, 2차 대전에 참전한 미국은 패권국가로 올라섰다. 이런 ‘팽창국가’ 미국이 전후 공산혁명의 전 지구적 수출을 꾀한 소련에 맞선 것이 냉전이라는 설명이다. 소련은 이미 1917년 볼셰비키 혁명 이후 반제국주의‧반식민주의 세력의 구심점이 되고 있었다.
6‧25 한국전쟁에서 보듯 냉전은 아시아에서 격렬했다. 지은이는 “한국전쟁은 가장 소름 끼치는 냉전의 충돌 사례”라며 “한국인 사이의 격렬한 이념 대립과 초강대국의 개입이라는 냉전의 틀이 낳은 비극”으로 평가했다. 국내외에서 냉전 정치가 복잡하게 얽히며 결국 분쟁으로 이어졌다는 점에서 “충분히 피할 수도 있었던 전쟁”이라고 지적한다.
지은이는 중국의 역할에 주목한다. 국공내전에서 승리한 중국 공산당은 스탈린의 국제공산주의 노선에 따라 북한의 남침을 배후 지원했고 참전까지 했다. 냉전‧동아시아사 전문가답게 지은이는 한국전쟁의 기원을 19세기 말 중국의 힘이 무너진 동아시아 공간을 20세기 들어 이념 대립이 덮친 데서 찾는다. 지은이는 이미 『냉전의 지구사』(에코리브르), 『제국과 의로운 민족』(너머북스) 등의 저서에서 냉전과 동아시아 관련 논의를 펼쳐왔다.
주목할 점은 지은이가 한국전쟁을 냉전 전지구화의 발화점으로 여긴다는 것. 한반도의 비극을 목격한 세계는 공포에 휩싸였고, 이는 전 지구적 냉전과 군사화, 대결로 이어졌다는 설명이다.

글로벌 냉전 사례는 브라질을 비롯한 남미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좌우 세력의 장구한 대치와 상호증오, 상대의 악마화에서도 찾을 수 있다. 냉전은 2차 대전 뒤 독립과정에서 종교·정체성 문제로 분단되고 서로 싸운 인도와 파키스탄에도 영향을 끼쳤다. 소련과 가까웠던 네루 총리의 인도와 미국과 준동맹 관계를 유지했던 파키스탄은 냉전의 또 다른 장을 형성했다. 중동에선 잔존 제국주의의 명백한 위협을 보여준 1953년 수에즈 위기 이후 상당수 아랍국가가 소련에 밀착하면서 냉전을 더욱 복잡하게 만들었다.
지금도 냉전의 일그러진 사고와 관념이 국제정치는 물론 수많은 나라의 국내 정치, 내부 갈등, 무한경쟁 체제 등에도 남아있다는 지적에는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다. 힘과 폭력에 의한 문제 해결 추구, 경쟁적‧대결적 사고방식, ‘나는 선이고 상대는 악’이란 이분법적 사고와 신념체계가 그것이다.
특히 이분법에 빠지면 세상을 아군과 적군, 이쪽과 저쪽으로 구분해 서로 증오하고 갈등하며 상대를 말살할 때까지 자원을 갈아 넣고 끝없이 싸우게 된다며 냉전의 최대 해악으로 꼽았다. 도덕적 자기 확신, 상대와의 대화 회피, 군사적 해법에 대한 전적인 신뢰와 의존이 이분법의 배경. 미국이 베트남이나 이라크, 아프가니스탄에서 벌인 전쟁이 바로 그런 사례다. 사회적 분열과 갈등의 고질화도 냉전의 표상인 이념 대결의 연장이 아닐까. 원제 The Cold War: The World Histor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