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인들이 제일 미워하는 세 부류의 인간이 있다. 부정한 수단을 동원해 명문대에 합격한 수험생, 부정한 수단을 동원해 병역 면제를 받은 남성, 그리고 역시 부당한 수단을 동원해 좋은 직장에 취업한 젊은이들이다. 셋 다 본인은 물론 부모도 비리에 연루됐을 개연성이 매우 크다.
박근혜정부 시절인 2016년 국정 농단 의혹이 불거져 결국 대통령 파면 사태까지 이른 데에는 박 대통령의 비선 실세로 알려진 최서원(개명 전 최순실)씨의 딸 정유라씨를 둘러싼 이화여대 부정 입학 정황이 결정적 역할을 했다. 대법관, 감사원장을 지낸 이회창 전 국무총리가 1997년과 2002년 대통령 선거에서 모두 낙선한 것은 두 아들이 석연치 않은 이유로 군대에 안 갔다는 의혹 제기 때문이었다.

한국 경제의 저성장으로 좋은 직장에 들어가는 것이 하늘의 별따기만큼이나 어려워진 요즘은 채용 비리가 국민적 공분을 일으키곤 한다. 이명박정부 시절인 2010년 당시 유명환 외교부 장관의 딸이 외교부에 입부하는 과정에서 특혜가 있었다는 의혹은 장관의 낙마로 이어진 것은 물론 콧대 높기로 유명한 외교관들의 자존심에 씻을 수 없는 상처를 남겼다.
헌법 기관인 중앙선거관리위원회(선관위)가 수년 전부터 국민적 불신의 대상이 된 것도 따지고 보면 선관위 고위직 자제들의 특혜 채용 정황 때문이다. 선관위 공무원 중에 직원들 사이에서 ‘세자’(世子)로 불리는 이가 있어 확인해보니 선관위 사무총장(장관급)의 아들이었다니, 참으로 기가 찰 노릇이 아닌가.
고려와 조선 시대에 ‘음서’(蔭敍)라는 제도가 있었다. 두 왕조 모두 오늘날의 5급 공무원 공채 시험에 해당하는 과거(科擧)를 운영했으나, 공직자 전부가 과거에 합격한 것은 아니었다. 아버지 또는 가까운 친인척이 고위 관료인 경우 과거에 응시하지 않고도 공직에 진출할 수 있도록 한 것이 바로 음서제다. 그 폐단이 어찌나 심각했던지 조선 후기가 되면 음서제로 등용된 관료가 너무 많아 정작 과거 시험 합격자는 갈 곳이 없었다고 한다.

대한민국 헌법이 1948년 제헌 때부터 현재까지 80년 가까이 “사회적 특수 계급의 제도는 인정되지 아니하며, 어떠한 형태로도 이를 창설할 수 없다”(11조 2항)라는 규정을 두고 있는 것도 음서제의 해악을 경계하기 위함일 것이다.
노무현정부 시절 도입이 확정된 법학전문대학원(로스쿨)은 2009년 개원 당시만 해도 ‘현대판 음서제’라는 지적을 많이 받았다. 로스쿨 학비가 만만치 않은 상황에서 반드시 로스쿨을 졸업해야만 법조인이 될 수 있도록 했으니 옛 사법시험 수험생들이 반발한 것은 당연했다.
과거 사시(28회)에 합격하고 로스쿨이 아닌 사법연수원(18기)을 거쳐 변호사가 된 이재명 대통령이 25일 “(법조인이 되는) 모든 길은 로스쿨밖에 없어야 하나. 실력이 되면 로스쿨을 나오지 않아도 변호사 자격을 검증해 줄 수 있는 것 아닌가”라고 밝혔다. 현행 로스쿨 제도에 대해 “과거제가 아닌 음서제가 되는 것 아니냐는 걱정도 잠깐 했다”고도 했다. 사시 부활을 원하는 이들이야 적극 환영하겠으나, 전국 25개 로스쿨은 바짝 긴장할 수밖에 없을 듯하다.
김태훈 논설위원 af103@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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