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겨울 산중에 눈이 내리면 산길보다 들길을 걷는다. 흰 눈을 맞으며 사람 사는 마을과 푸른 산을 바라보면 온몸이 청신하게 시린다. 눈 덮인 들길을 걸을 때면 나는 어김없이 떠오르는 시가 있다. 조선 후기 문신 이양연의 시다. 백범 김구 선생이 중요한 결정을 내릴 때마다 숙고했던 시다.
“踏雪野中去(답설야중거·눈 내린 들판을 걸을 때/ 不須胡亂行(불수호난행·함부로 어지러이 걷지 마라)/ 今日我行跡(금일아행적·오늘 걷는 나의 발자국은)/ 遂作後人程(수작후인정·뒷사람의 이정표가 되리니)”
이 시를 읽을 때마다 ‘오늘 걷는 나의 발자국’과 ‘뒷사람의 이정표’를 되새긴다. 이 세상은 나와 이웃이 어우러져 살아간다. 화엄경에서는 모든 생명체는 떼려야 뗄 수 없는 그물코라고 표현한다. 상호의존하는 생명의 이치로 우리 모두를 살펴보면 나는 곧 너의 나이고, 너는 곧 나의 너이다. 이런 생명의 연결망이 우리에게 주는 메시지는 무엇일까? 나의 생각과 행위가 그대로 이웃에게 영향을 미치기 때문에 나를, 자신을 바로 세우고 가다듬는 ‘수신(修身)’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세상이 참 불안하다. 산중 수행자에게도 위기감이 엄습해온다. 매 순간이 절박하다. 지난해 12월3일, 대통령의 비상계엄 사태 이후 시국이 더욱 그러하다. 혼군 암군 폭군의 시대, 조지 오웰의 소설 <1984>의 이중사고를 떠올리지 않을 수 없다. 소설에서 이중사고는 모순되는 두 가지 신념을 마치 하나인 것처럼 신봉하도록 왜곡한다. 빅브러더는 개인의 자유로운 사고를 조작하는 이중사고를 권력 유지 수단으로 사용한다. 그는 ‘전쟁은 평화, 자유는 예속, 무지는 힘’이라고 규정하고 대중들에게 세뇌시킨다. 윤석열이 이를 차용한 듯하다. ‘계엄은 고도의 통치, 참패한 선거는 부정 음모, 약자와 동행하는 공동체는 공산 전체주의’가 된다. 어처구니없는 민주사회의 퇴행에 온 나라가 휘청인다.
어지러운 오늘, 우리가 가야 할 길을 옛 문장에서 찾아보자. 오랜 시간 많은 사람의 생생한 경험과 모색, 그리고 수많은 시행착오로 삶의 이치를 증명하는 문장이다. ‘수신제가치국평천하(修身齊家治國平天下)’, ‘치국’과 ‘평천하’ 앞에 놓인 ‘수신’의 무게가 묵직하고 절실하다. 수신은 개인의 도덕성을 넘어 가치관, 역사적 소명, 지향점, 판단 능력, 경청하고 대화하는 소통의 덕목 등을 아우른다.
정치 지도자, 특히 선출직에 나아가고자 하는 자는 아무리 대중의 요구가 많을지라도 거듭 자신을 짚어봐야 한다. 자신이 과연 그 자리에 앉을 그릇이 되는가를 살펴야 한다. 수신의 기본은 분수와 처신, 즉 자신을 향한 정직한 성찰이다. 윤석열의 경우가 그렇다. 윤석열은 자신이 대한민국을 책임질 대통령의 자질과 능력이 있는지를 살피지 않았다. 소위 깜냥이 되지 않음에도 여론 지표에 들떠 있었던 것이다. 로마의 장군 루키우스 킨키나투스는 로마의 독재관으로 선출되어 로마를 위기에서 구했으나 임무를 완수한 뒤 바로 사임하고 농부로 돌아갔다. 그는 자신의 분수와 처신을 살피는 ‘수신’을 완수한 것이다. 무릇 길이 아니면 가지 말고 오르지 못할 나무는 오르지 않는 것이 나와 모두에게 이롭다. 끊임없는 자기객관화가 수신의 출발이다.
설령 어떤 분야에서 탁월한 능력을 인정받는다 해도, 대중을 위해 헌신하겠다고 정치에 들어선 사람은 평생을 수신하는 훈련이 필요하다. 시민의 권력을 잠시 위임받은 자신이 청정한 초심을 유지하고 있는지, 반대편의 주장과 대중의 여론을 경청하는지를 끊임없이 점검해야 한다. 특히 인간에 대한 연민과 공감, 사회 정의에 투철하게 다가가고 있는지를 거듭거듭 짚어야 할 것이다.
정치는 결코 수싸움과 세싸움이 아니다. 연민과 공감, 대화와 경청이라는 ‘도(道)’는 없고 오로지 내 편만이 옳고 이겨야 한다는 치졸한 ‘술(術)’만 난무하는 정치는 얼마나 서글픈가. 도리가 살아날 때 정치는 고품격 종합예술이 된다. 위정자와 시민 유권자 모두가 자신에게 정직하고 준엄하게 질문하는 ‘수신’이 어느 때보다 절실히 필요한 시대가 아닌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