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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년 전 겨울이었던가, 서울 중랑천에 원앙 200여 마리가 떼로 나타났다고 많은 매체들이 화려한 원앙 떼 사진을 앞다투어 연일 보도한 적이 있었다. 원앙이 떼로, 그것도 200마리가 넘게 떼를 지어 나타난 일은 세계 최초의 일이라고 전문가들의 입을 빌렸다. 모두 ‘세계 최초’를 앞세웠다. 그런데 그 세계 최초에 세인들은 그리 관심을 보이지 않은 듯했다. 강연을 다니며 사람들에게 그 ‘최초’를 보았느냐고 물어보아도 그 보도를 보았다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오래전 강길 십리 길을 걸어 출퇴근할 때였다. 강물을 지척에 둔 길이었다, 길은 차가 다닐 정도로 넓게 나 있었지만, 풀과 나무가 너무 오래 자라 있고, 또 그 길을 이용해야 할 경제성이 없어서 그런지 2년 동안 차도 걷는 사람도 거의 보지 못했다. 이슬 때문에 나는 반바지를 입고 출근해서 긴바지로 바꿔 입어야 했다. 어느 날 강물이 쉬어 가는 소(沼)에 물결이 요동치고 있었다. 물결을 일으키는 그 물체(?)는 등과 머리를 드러내놓고 헤엄을 치고 있었다. 오싹 겁이 나고, 혼자 놀래 주위를 둘러보았다. 용이 못된 구렁이가 우리 마을 근처 큰 호수(그 용소가 지금은 없다.)에 살았다는 말을 듣고 살았기 때문이다. 자세히 보니, 수달 두 마리였다. 수달을 너무 오랫만에 본 것이다. 출근해서 신문을 뒤적이는데, 우리나라에 수달이 멸종되었다는 기사가 있었다. 신문사로 전화했다. 기자님은 수달이 멸종되었다는 전문가들의 의견을 들었다고 못 박았다. 나는 아침에 분명히 수달을 보았다고 한 번 더 말했다.
원앙 떼가 서울 중랑천에 세계 최초로 200여 마리가 나타났다는 그 기사의 화제 성에 내가 놀랐던 것은, 지난 3. 4년 동안, 수달이 나타났던 그 강에 원앙이 208마리 정도까지 날아와 한겨울을 지내다가 갔다는 ‘사실’이었다. 어떻게 208마리 정도라고 그 숫자를 거의 정확하게 말할 수 있느냐고요? 사진을 찍어 세어 보았으니까요. 어떤 해는 청둥오리 떼와 원앙 떼가 마을 앞 강을 가득 메우고 ‘찬란’하게 먹이를 찾아 먹기도 했다.
3년 전부터는 홍 머리 오리들이 외진 강물에 와서 살다 간다. 작년과 올해부터는 댕기흰죽지 오리리가 여러 마리가 강물에서 놀고 있다. 청둥오리, 비오리, 호사비오리는 철새다. 호사비오리는 멸종 위기 새다. (이 오리에게 총 쏘면 크게 벌 받는다.) 논병아리와 쇠오리, 쥐오리는, 토종 오리다. 토종 원앙도 몇 마리 산다. 어떤 해에는 물닭, 깃털이 우아한 호방 오리도 왔다 갔다. 참, 내, 원, 몇 년 전부터 가마우지도 온다. 개인적인(?) 의견이지만 나는 가마우지가 우리 마을 산천하고 어울리지 않게 너무 검고 커서 정서적인 불쾌감과 거부감이 있다.
우리 마을 앞 강에 와서 한겨울을 나던 원앙 떼는 어디로 가버렸는지 나는 모른다. 내가 좋아하는 새 연구가 한 분이 남원에 사신다. 그분의 말에 의하면 원앙들은 기온이 자기들에게 맞고 먹이가 있는 곳으로 이동한다고 아주 조심스럽게 말한다.
어느 날 나는 길을 걷다가 길가 숲에서 붉은 머리 오목눈이와 눈이 마주친 적이 있었다, 새가 그 작고 까맣게 환한 눈으로 나를 보고 있었던 것이다. 나는 그 작고 선량한 눈을 보고 하마터면 울 뻔했다. 그렇게 겁 없고 작고 선량한, 아름다운 눈을 처음 마주친 것이다. 며칠 전 흰 댕기 죽지 오리 사진을 확대해 보다가 또 놀랐다. 또, 정말, 진짜로, 참말로 그렇게 아름다운 테두리 속에 눈을 두고 있다니, 검은 바탕에 그 작고 똥그랗고 또렷한 눈가 테두리는 놀랍게도 노란색이다. 나는 숨이 막힐 정도로 그 눈이 서늘하여서 하마터면 사랑한다고, 말을 해 버릴 뻔했다.
나는 나만 외롭게 알고 있어야만 하는, 새들의 경이로운 생태와 태도들을 간직하고 있다. 누구에게 말해 보았자 사람들은 새들의 선량한 눈 따위엔 관심이 없다는 것을, 나는 익히 알고 있다. 어쩌다 새들과 눈이 마주칠 때마다 나는 어디서 읽었던 임마누엘 칸트에 대한 이 글이 생각나곤 한다. ‘칸트는 참으로 선량한 사람이다. 바로 이것이 그가 오늘날에도 세상에서 의미를 잃지 않은 이유다.’ 선량은 눈에 고이 간직되어 있다.
김용택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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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들의 눈
기고 gigo@jjan.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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