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이언스온고지신]150년 이어온 과학·산업 언어 '측정표준'

2025-07-02

2025년은 세계 측정표준 과학계에 있어 특별한 이정표가 되는 해다. 1875년 5월 20일, 프랑스 파리에 모인 17개국이 '미터협약'을 체결한 지 150주년이 되는 해이기 때문이다. 오늘날 우리가 일상적으로 사용하는 미터(m), 킬로그램(㎏)과 같은 단위들이 국제적인 공통 언어로 자리 잡을 수 있었던 것은 바로 이 미터협약 덕분이다.

미터협약은 단순히 측정 단위를 정한 것이 아니라, 서로 다른 언어와 문화를 가진 국가들이 하나의 기준을 바탕으로 과학기술과 산업 기반을 함께 구축하기 시작한 위대한 약속이었다.

하지만 이 약속은 하루아침에 이뤄진 것이 아니었다. 프랑스 혁명 당시만 해도 프랑스에는 지역마다 사용하는 도량형이 달라 무려 25만 가지에 이르는 단위들이 혼재했고, 이로 인한 혼란과 불만은 사회 전반에 깊이 퍼져 있었다.

'하나의 길이, 하나의 무게'를 향한 요구는 결국 프랑스 혁명의 동력이 됐고, 이후 수많은 논의와 과학적 시도 끝에 1875년 미터협약이라는 국제 조약으로 그 결실을 봤다. 단위는 더 이상 소수의 권력자가 가진 도구가 아닌, 인류가 보편적으로 사용하는 사회적 약속이자 기본적인 권리가 된 것이다.

이를 기념해 지난 5월 20일, 파리 유네스코 본부에서는 '미터협약 150주년' 기념행사가 성대하게 개최됐다. 전 세계 측정표준기관 대표들과 유네스코 관계자, 과학자들이 한자리에 모였으며, 필자 역시 한국 대표로 참석해 측정표준이 과학과 산업에 기여한 바와 미래 역할에 대해 깊이 논의하는 뜻깊은 시간을 가졌다.

측정표준은 우리가 쉽게 인식하지는 못하지만, 일상 모든 것에 스며 있다. 우리가 매일 확인하는 시간, 숨 쉬는 공기의 질, 섭취하는 음식의 안전, GPS 내비게이션까지 모두 정밀한 측정표준이라는 기준을 통해 원활하게 작동되고 있다. 측정표준은 세상을 이해하고 구조화하는 인간의 가장 기본적인 도구다. 정확한 측정이 없다면 과학, 산업, 무역 모두 제대로 이뤄질 수 없다.

한국표준과학연구원(KRISS)은 지난 50년간 국가 측정표준을 확립·유지하고 첨단 측정기술을 개발해, 우리나라 산업 경쟁력 제고와 국민 삶의 질 향상에 기여해 왔다.

이제 측정표준은 단순한 계량 영역을 넘어 미래 첨단과학의 핵심으로 그 가치를 확장하고 있다. 양자기술, 인공지능(AI), 디지털 전환(DX), 반도체, 바이오, 우주항공 등 최첨단 분야 기반에는 정밀하고 신뢰할 수 있는 측정이 반드시 뒷받침돼야 한다.

예컨대, 양자컴퓨터 성능을 높이기 위해서는 원자 단위 정밀 제어가 필요하며, 우주 탐사나 차세대 통신기술 또한 매우 정밀한 측정기술과 데이터 신뢰성이 필수적이다. 원자 진동수를 이용한 광시계는 차세대 세계표준시 기반이 될 것이며, 양자과학기술은 AI와 결합해 미래 우리 삶을 근본적으로 변화시킬 것이다. 미래는 더 작고, 더 빠르고, 더 복잡한 시스템을 요구하며, 그 중심에 측정표준이라는 보이지 않는 질서가 존재한다.

KRISS는 이런 시대적 흐름 속에서 국가전략기술 기반이 되는 차세대 측정기술 개발에 주력하고 있다. 특히, 세계적 수준 양자 측정기술을 바탕으로 초전도 및 중성원자 양자컴퓨팅 시스템 개발, 원자간섭계를 활용한 고정밀 중력 측정, 광시계를 이용한 정밀 시각 측정 등은 모두 미래를 이끌 핵심 기술로 주목받고 있다.

'세상의 기준을 만드는 KRISS'는 혁신의 경계를 넘어, 보편성과 미래 지향성을 아우르는 새로운 측정 패러다임을 만들어가고 있다. 50년간 쌓아온 신뢰를 바탕으로, 앞으로도 KRISS는 정밀 측정기술로 미래 산업과 과학기술 경쟁력을 뒷받침하고 대한민국이 글로벌 기술 강국으로 도약하는 길을 활짝 열어나갈 것이다.

이호성 한국표준과학연구원 원장 hslee@kriss.re.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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