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림들이 빠진 독립선언서 작성에 통탄
파리평화회의에 보낼 조선독립 청원서
‘회당본’, ‘중제본’ 거쳐 ‘면우본’ 완성
1919년 3월 만세운동이 벌어졌지만, 민족대표 33인이 독립선언을 모의하는 과정에 유림(儒林) 측과 사전교섭이 원활하지 못해 유림은 참여하지 못했다. 유림은 당시 시대 인식이 통일된 상태는 아니었다. 왕조의 복귀 찬성과 반대로 의견이 나누어져 있었다. 하지만 만세운동의 영향으로 유림의 시대 인식은 점점 위정척사적 경향에서 탈피하게 되었다.
심산(心山) 김창숙(金昌淑, 1879~1962)이 1919년 3월 초이틀 광무황제의 장례식[因山]에 참석하기 위해 서울에 올라갔다. 그곳에서 유림들이 빠진 독립선언서가 작성되었다는 사실을 알고 통탄했다. 치욕을 씻을 방도로 경성에 모인 유림인 김창숙・김전호・성태영・이중업・유준근 등은 거창에 있는 유림의 종장(宗匠)인 면우(俛宇) 곽종석(郭鍾錫, 1846~1919)이 중심이 되어 그가 파리평화회의에 보낼 글을 적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곽윤(郭奫, 1882~1927)과 김황(金榥, 1896~1978)을 거창으로 보냈고 경성 유림들은 각각 지방을 맡아 연락을 하기로 하였다. 김창숙은 영남지역을 담당했다.
김창숙이 1919년 3월 15일 병석에 있던 곽종석에게 경성 유림단이 파리강화회의에 조선독립 승인 청원서를 제출하려 함을 알리고 곽종석의 서명과 청원서 초안 작성을 부탁하였다. 곽종석은 경북 성주의 회당(晦堂) 장석영(張錫英, 1851~1926)에게 초안 작성을 요청하였다. 곽종석은 집을 방문한 젊은 문인들에게도 시험 삼아 독립청원서를 기초할 것[試草]을 권유했다. 권유를 받은 문인은 권명섭・김수・김황 등이었다.
중제(重齊) 김황(金榥)이 초고를 쓰고 곽종석(郭鍾錫)과 김창숙이 이를 수정하고, 장영석 안은 참고하였다. 외교 서한으로 영어 불어 등으로 번역해야 하기에 반드시 사실에 입각한 선명한 내용이 요구되었기 때문이다. <파리장서>는 ‘회당본’, ‘중제본’을 거쳐 곽종석과 김창숙의 협의로 ‘면우본’이 완성되었다. 곽종석의 조카 곽윤을 불러 정본을 쓰게 한 다음, 그것을 메투리[麻復]날 줄로 꼬아서 숨겨 가지고 가기 좋도록 해주었다. 장석영의 조카는 곽종석이 작성한 청원서를 베껴 장석영이 작성한 것과 함께 장석영의 집으로 되돌아갔다. 결국 곽종석의 뜻이 담긴 파리장서가 만들어졌고 유림들의 서명이 본격화되었다.
‘면우본’과 ‘지산본’ 통합 ‘수정 면우본’
137명 유림 서명, 파견 대표로 김창숙
파리에 머물던 김규식 통해 제출하기로
3월 말에도 여전히 서명자 규합 활동은 종료되지 않았다. 그런데 호서 지방의 유학자 17명이 지산(志山) 김복한(金福漢, 1860~1924)을 수석 연명자로 한 별개의 ‘파리장서’를 작성하여 경성에 3월 22일경 도착했다. 결국 파리장서는 ‘면우본’과 ‘지산본’ 두 개를 하나로 통합하는 논의가 다시 진행되었다. 경성의 유림들은 “면우 선생이 지은 것이 매우 선명하고 충실해서 다시 더 말할 나위가 없다”라고 결론을 내리고, 명단은 하나로 합치기로 하였다. 호서 유림들도 인정하여 결국 면우본의 내용과 서명자를 합하기로 한 ‘수정 면우본’이 최종 <파리장서>로 채택되었다. 영남학파와 호서학파 유림 서명자는 모두 137명이었다. 이북 출신의 서명자는 없었다. 파리로 파견될 대표로 김창숙이 확정되었다.
파리장서 운동에 능동적으로 참여한 사람들은 주로 4개 학맥에서 나왔다. 상위 서명자 4명은 각각의 학맥을 대표했다. 수석 서명자 곽종석은 한주 이진상의 직전(直傳), 재부(再傅) 문인들을 대표했다. 제2위 서명자 김복한은 호서 지방의 노론 계열 호론(湖論) 유림을, 제3위 서명자 고석진은 호서 ·호남의 면암 최익현 학맥을 대표했다. 제4위 서명자 유필영은 영남 지방의 남인 호론(虎論) 계열 유림을 대표했으며, 정재 유치명의 직전, 재전 문인들이 그를 좇아 광범하게 서명에 참가했다. 6개 도에 흩어진 유학자 137명의 조직적 결속을 이끌어내는 일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비교적 짧은 기간 동안에 이를 실현시킬 수 있었던 까닭은 유학자들을 동원하는 사회적 요인이 큰 작용을 했기 때문이었다.
김창숙은 1919년 3월 23일 밤 10시 극비리에 고국을 떠나 망명길에 올랐다. 김창숙은 봉천・천진을 거쳐 3월 27일 상해에 도착하였다. 봉천에 이르렀을 때 오랫동안 벼르던 상투를 잘랐다. 서울에서 동지들로부터 머리(상투) 깎기를 권유받고 이때에야 실행했다.
“내가 상투를 보전한 것은 왜놈의 신하가 아님을 밝힌 뜻이다. 지금 국가의 독립을 위해서 이 몸을 바쳤으니 이미 몸을 바치고 머리털을 버리기 아까워할 것인가. 다만 해외로 나가기 전에 머리를 깎으면 혹 수상히 여겨 화를 부르는 단서로 될 염려가 없지 않다. 여러분은 조금 기다려 주기 바란다.”
김창숙은 중국에서 상투를 자르고 중국옷과 중국 모자를 사서 중국인으로 변장하였다. 3월 27일 상해에 도착하였다. 김창숙이 상해에 도착한 날부터 매일 석오 이동녕 등 여러 사람과 만나 앞으로 할 일을 의논하였다. 독립운동가들과의 대화에서 김창숙의 파리행은 처음부터 무리가 수반되었음을 알게 되었다. 프랑스어를 전혀 모르는 상태에서 파리평화회의에 참석한다는 것은 보통 일이 아니었다. “서양행을 중지하고 휴대하여 온 글은 서양말로 번역하여 상해에서 우편으로 직접 파리평화회의에 보내는 것이 좋겠다. 그러면 천하만국의 사람들에게 한국 유교인의 대운동이 알려져 대내외에 큰 선전이 될 것이다.”라는 독립운동가들의 권유를 수용했다. 상해에 있던 선배, 동료들은 김창숙의 파리로의 출국을 만류하고 대신 신한청년당의 해외 대표로 파리에 머물러 있던 김규식을 통해 평화회의에 독립청원서를 제출토록 조언했다. 김창숙은 이 의견이 합리적이라 판단하고 따르기로 하였다. 파리행이 중지되었다.
양산 출신 윤현진 영문 번역
파리에 보낼 청원서를 영문으로 번역한 사람은 양산에서 망명한 우산 윤현진이 담당했다. 그는 동경 명치대학 법학과를 유학한 인재로 영어와 한문에 능통했다. 4월 9일경 김창숙은 파리에 제출할 서한의 영문 번역 문제가 시급하여 그 책임을 윤현진에게 맡겼다. 윤현진이 <파리장서>를 번역했다고 김창숙이 직접 증언한 것은 없다. 공식적으로 그가 남긴 글에는 없다. 윤현진에게 위촉하였다는 관련 근거를 현재까지 제시한 논문은 없다. <벽옹일대기>는 김창숙이 검토한 것이기에 윤현진 번역으로 인정받은 것이다. 김창숙의 기록에는 자기와 적대적 인물에 대해서는 기록을 하지 않거나 변절자로 기록하고 있다. 백산상회와 국권회복단에서 활동했던 남형우와 김응섭이 그러했다. 특히 김응섭은 김창숙의 파리장서와 별도로 상해에 가져갔다. 이 두 사람은 분명 만났을 터인데, 양쪽 모두 기록을 하지 않고 있다.
영문번역자인 윤현진은 남형우와 깊은 인연이 있었다. 김창숙은 윤현진의 이름도 거론하지 않았다. 양산 출신 윤현진은 1919년 상해 임정에서 재무차장으로 임정 살림살이를 도맡았다. 그는 안창호와 함께 임정 초기 차장 정치 시대를 열었던 인물이다. 남형우와 김응섭은 상해 임정에서 남형우는 법무차장과 법무총장·교통총장을, 김응섭은 법무장관을 역임하였다. 1919년 남형우는 상해에서 신채호, 김두봉과 <신대한> 신문을 발간하였다. 김응섭은 남만주 지역에서 사회주의 세력을 대표하는 인물로 성장하였다.
파리장서의 내용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한국은 삼천리 강산에 2천만 백성이 있으며 4천여 년을 유지 보전한 동방 문명국가이다. 일본은 거짓 맹약으로 한국을 강제 병탄하였다. 일본의 한국 식민지화가 한국인이 원했던 것이라는 일본의 거짓 선전은 만국의 신의에 어긋나는 일이다. 폴란드 등이 독립된 바와 같이 한국도 독립되어야 한다. 한국은 독립국가를 다스릴 능력이 충분히 있다. 만국의 공정한 판결이 있다면 한국은 독립할 것이다. 우리는 죽더라도 일본의 종은 안 될 것이다.”
4월 11일경 김창숙은 윤현진이 번역한 장서 원문을 파리의 김규식에게 우송하여 평화회의에 제출하도록 하였다. 또 국한문 혼용으로 번역하여 영문본과 국한문본 3000부씩 인쇄하여 파리평화회의 의장과 각국 대표에게 발송하였다. 또 각국의 대사・공사・영사관 및 중국의 정계 요인, 언론계, 그리고 국내의 향교와 유림들에게 우송하였다. 교포가 거주하는 중국의 여러 항구나 도시에도 배포하였다. 국내에는 한문본으로 지방 향교 및 지하 신문사 등 ‘각 기관’에 우송했다. 아마 파리는 4월경에, 국내는 6월 초・중순 무렵에 발송했을 것으로 짐작된다.
프랑스 파리평화회의에 참석한 김규식 일행은 큰 노력을 하였음에도 별 성과를 얻지 못했다. 프랑스 일간지 <라 랑테른>은 1919년 8월 8일 자에서 “일본의 속박 아래 꼼짝 못 하고 떨고 있는 2천만 영혼의 간청에도 성의 있게 답하지 않는, 정의와 사상을 사랑한다고 말하는 프랑스에 그(김규식)는 경악했다”라고 보도했다.
거창 이성훈 고가에서 한문본 발견
<파리장서> 영문본 독립청원서는 현재까지 원본이나 그 존재가 확인되지 않고 있다. 현재 <파리장서> 한문본은 1961년 거창 국농소(國農所)에 거주하던 이성훈(李成熏)의 고가(古家) 변소 천장에서 발견된 것이다. 김창숙이 국내에 발송한 문건으로, 김창숙의 감정을 통해 진본임이 확인되었다.
4월 12일 경상북도 성주의 독립만세운동에 참가하여 일본 경찰에 붙잡혔던 송회근에 의해 파리장서 사건이 발각되었다. 이후, 곽종석 이하 대다수가 일본 경찰에 의해 체포되었으며, 일부는 망명하였다. 서명자에 대한 기소율은 20%(27/137)였다. 서명자 대부분은 경찰서에서 조사를 받은 뒤 풀려나거나, 검사 조사 단계에서 ‘증거불충분’으로 석방된 경우가 많았다. 최종심에서 유죄를 받은 서명자는 18명이었다. 이중 실형을 받은 인물은 곽종석(징역 2년), 김복한(징역 1년), 이봉희(징역 10월) 등 3명이었고, 나머지는 집행유예(15명) 혹은 무죄(9명)를 받고 석방되었다. 곽종석, 하용제, 김복한 등은 감옥에서 순국하였다.
울산 웅상 주남리의 64세 이규린(李奎麟, 1856 ~1937)도 137명의 서명자 중 1인으로 검거되어 고초를 겪었다. 이규린은 1856년 3월 26일 지금의 울주군 웅촌면 석천리에서 이하찬(李夏燦)과 울산 박씨 사이에 둘째로 태어났다. 본적은 경상남도 양산군(梁山郡) 웅상면(熊上面) 주남리(周南里)이다. 본관은 울산(蔚山)이고, 자는 헌길(軒吉)이다. 1919년 독립청원서인 파리장서에 서명한 137명 중 136위로 서명하였다. 그는 파리장서 사건으로 일본 경찰에 체포되어 고초를 겪었다. 1926년 1월 김창숙(金昌淑)의 군자금 모금 운동에 힘쓰던 중 1926년 3월에 일제 경찰에 붙잡혔다. 예심 결과 1927년 1월 21일 대구지방법원에서 면소를 받고 풀려났다. 1937년 10월 2일 지금의 양산시 주남동에서 사망하였다. 1995년 건국훈장 애족장이 추서되었다.
이병길 작가 지역사 연구가, 항일독립운동연구소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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