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랑 고향의 화왕 모란, 모란을 닮은 강진 한정식

2025-10-27

[전남인터넷신문]모란(牡丹)은 예로부터 ‘꽃 중의 왕(花王)’이라 불렸다. 중국 당나라 때부터 “백화지왕(百花之王)”으로 추앙받았고, 우리나라에서도 『고려사』와 『고려사절요』에는 현종(顯宗, 재위 1009~1031년)이 궁궐 안에 모란을 심고, 신하들과 시를 주고받았다는 기록이 전해진다. 고려 시대의 모란 사랑은 국왕의 감상과 시문(詩文) 속에 깊이 배어 있었다. 조선시대에 이르러서도 궁궐과 사대부가의 정원에서 모란은 부귀화(富貴花)라 하여 가장 귀히 여겨졌으며, 그림·자수·도자기·가구 문양 속에 빠지지 않는 존재였다.

모란이 ‘꽃 중의 꽃’으로 불리는 까닭은 그 화려한 자태 때문이다. 크고 풍성한 꽃잎, 짙고 깊은 향기, 붉음과 자주, 분홍으로 이어지는 다채로운 색감은 다른 꽃이 따를 수 없는 위엄을 지녔다. 동시에 모란은 부귀와 영화, 존귀와 번영의 상징으로, 옛 화가들은 인생의 절정과 풍요를 그리는 마음으로 모란을 화폭에 담았다. 그러나 그 화려함만큼 덧없음 또한 짙다. 일주일 남짓 피었다 지는 모란의 운명은 시인들의 마음을 오래 붙들었다.

시인 김영랑은 그중에서도 인간의 기다림과 상실, 아름다움의 유한함을 가장 섬세하게 노래했다. 그의 대표작 〈모란이 피기까지는〉은 한 송이 꽃의 찰나에 인생의 정한(情恨)을 담은 명시다. “모란이 피기까지는 나는 아직 나의 봄을 기다리고 있을 테요.” 이 첫 구절은 단순한 계절의 기다림이 아니다.

사랑하는 이를 향한 그리움, 잃어버린 청춘을 되찾고 싶은 염원, 완전한 아름다움이 오기를 바라는 인간의 간절함이 응축된 문장이다. 김영랑은 짧은 생애의 모란 속에서 존재의 덧없음과 생의 쓸쓸함을 보았으나, 그 덧없음 속에서도 다시 봄을 기다리는 희망을 발견했다. 모란은 사라짐이 곧 새로운 기다림의 시작임을 일깨워주는 존재다.

강진군 강진읍 남성리에 자리한 ‘영랑생가’와 세계모란공원에는 봄이면 모란이 흐드러지게 핀다. 영랑생가와 인접한‘강진시문학파기념관’에서는 모란이 시로 피어나고, 세계모란공원과 사계절모란원에서는 꽃과 조형물로 모란을 만날 수 있다. 그 앞에 서면 누구나 그의 시 한 구절을 떠올린다. “내 한 해는 모란이 피기까지”. 그의 시어는 계절의 노래이자 인생과 자연의 순환을 꿰뚫는 철학이다.

이러한 영랑의 시 세계는 강진의 음식문화에도 스며들어 있다. 영랑생가 인근인 강진읍 남성리에 있는 한정식집들은 모란의 품격을 닮았다. 강진의 산과 들, 바다에서 나는 재료를 아낌없이 담아낸 ‘산해진미(山海珍味)’의 밥상은 한 편의 시와 같다. 육회, 갈치조림, 전복과 소라, 송어회, 새우구이까지... 붉은빛과 자색, 흰살과 초록빛이 조화롭게 어우러진 한상은 마치 모란의 꽃잎이 겹겹이 피어나는 듯하다. 청자빛 그릇의 은은한 광택은 강진 청자의 전통미를 잇고, 음식마다 간결한 간과 자연스러운 맛은 남도 음식의 품격을 전한다.

봄의 나물, 여름의 해산물, 가을의 장아찌, 겨울의 묵은지까지... 계절은 밥상 위에서 순환하며 모란의 생애처럼 피고 진다. 화려하지만 절제된 강진의 한정식은 눈으로 보고, 향으로 느끼고, 마음으로 맛보는 예술이다. 사람들은 한상 앞에 앉아 조용히 말한다. “이건 마치 모란 한 송이가 피어난 듯하네.” 그래서 강진의 한정식은 ‘식왕(食王)’이라 불러도 손색이 없다.

고려청자의 고장인 강진의 도자기에도 모란이 있다. 미국 스미소니언 국립아시아미술관 소장 〈봉황과 모란지상 상감청자 대접〉(F1904.116) 은 고려 14세기 후반, 전남 강진(사당리) 가마 제작으로 분류되며, 봉황과 모란 문양이 상감으로 장식되어 있다. 강진 대구면 청자촌길의 고려청자박물관에서도 모란은 청자의 예술성을 상징하는 대표 문양으로 전시된다. 박물관 옆 한국민화뮤지엄에는 모란을 소재로 한 민화가 다수 전시되어 있으며, 관람객은 ‘모란의 미학’을 시각과 감각으로 함께 체험할 수 있다.

강진의 예술은 도자기와 민화, 그리고 음식으로 이어지며 모란의 철학을 현대적으로 되살린다. 청자의 귀한 푸른빛과 자태는 모란을 닮았고, 한정식의 색과 향은 민화 속 모란의 화려함을 닮았다. 시와 예술, 음식이 서로를 비추며 강진이라는 공간 안에서 하나의 ‘모란미학(牡丹美學)’을 완성한다.

모란이 꽃 중의 왕이라면, 강진의 한정식은 밥상 중의 왕이라 할 만하다. 화려하지만 과하지 않고, 절정의 순간을 품되 절제된 품격을 잃지 않는다. 강진의 밥상은 시인의 언어처럼 정제되어 있으면서도 봄 햇살처럼 따뜻하다. 모란의 찰나가 시로 승화되었듯, 강진의 한정식은 한 끼 식사 속에서 예술이 된다. 김영랑의 시와 남도의 풍경, 고려청자의 예술, 민화의 색채가 어우러진 강진의 밥상, 수라상처럼 차려진 그 한정식은 바로 ‘식왕의 미학’이라 할 만하다.

모란이 피고 지는 찰나 속에 인생의 아름다움을 노래한 시인처럼, 강진의 밥상은 한 끼 식사 속에서 영원의 향기를 피워낸다. 강진에 가면, 사람들은 모란이 피어난 듯한 밥상 앞에서 잠시 말을 잃는다. 그리고 그 침묵 속에서 느낀다. “모란이 피기까지는, 나는 아직 나의 봄을 기다리고 있을 테요.” 그 봄은 지금도 강진의 모란을 닮은 한정식 위에서 고요히 피어나고 있다.

참고문헌

허북구. 2025. 천경자의 색과 고흥의 석류, 유자, 그리고 녹동의 장어요리. 전남인터넷신문 허북구농업칼럼(2025-10-26).

허북구. 2025. 갯펄이 키운 보성 벌교의 예술, 채동선의 음악과 꼬막요리. 전남인터넷신문 허북구농업칼럼(2025-1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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