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근 한국문화가 전세계적으로 관심받는 분위기 속에서 ‘케이팝 데몬 헌터스’가 정점을 찍고 있는 듯 하다. 한국 현대미술도 세계 주요 미술관에서 주목받고 있으며 한국 작가들의 개인전 소식도 자주 접하고 있어 더없이 반가운 상황이다. 이러한 흐름 속에서 최근 어느 미술전문 월간지가 진행하는 설문조사 중 ‘한국미술이 세계무대에서 주목받은 순간은?’이란 질문이 눈에 띄었다. 필자의 미술사 지식 속에서 한국 현대미술이 세계무대에 명함을 내밀었던 시작은 1961년 파리 비엔날레, 1963년 파리 비엔날레와 상파울루 비엔날레라고 생각했지만 작가 개인의 작품성이 제대로 평가받았던 최고의 하이라이트는 1995년 제46회 베니스 비엔날레에서 특별상을 수상한 전수천의 ‘방황하는 혹성들 속의 토우’라고 말할 수 있다.
창립 100주년을 맞이한 1995년 베니스 비엔날레의 큐레이터는 장 클레어(Jean Clair)와 디디에 오팅어(Didier Ottinger)였고, 그 해의 전시 제목은 ‘정체성과 대안성:신체의 형상(Identity and Alterity:Figures of the Body) 1895/1995’였다. 전시 타이틀의 ‘정체성’은 개인, 집단, 국가의 고유한 특성과 뿌리를 의미하며, ‘대안성’은 자신과 다른 존재를 인식하는 개념이다. 이 주제는 현대 사회의 다문화, 다양성, 세계화 속에서 각자의 정체성을 어떻게 유지하고 동시에 타인과 공존할 수 있는지에 대한 근원적인 질문을 던졌다. 이 전시는 앞선100년 동안 미술에서 인체의 표현에 대한 탐구를 보여주고자 했는데 무엇보다도 예술이 현대 문명 기술, 과학 및 의학 이미지와 연결하여 어떻게 반응하고 기록하고, 또 기록되었는지를 드러내는 작품들이 출품됐다. 달리 말하면 이러한 주제는 과학의 발달 속에서 예술은 어떻게 외부적 요인들과 연관을 이루어 왔는가를 보여주고 있으며 그에 따른 미술작품에 대해서는 예술의 외연이 확장되고, 사회적 기능과 관련된 경향을 요구하는 것이었다.
1995년 이전까지 한국 작가들은 베니스 비엔날레에 개별적으로 참여하거나, 다른 국가관에 속해 작품을 선보여야 했던 한계가 있었다. 한국은 1995년 베니스 비엔날레 100주년을 맞아 자르디니 공원 내 아시아 국가 중 일본에 이어 두 번째로 독립 국가관을 세우게 되었으며 자르디니 공원 안에 자리를 잡은 마지막 독립 국가관이 됐다. 한국관의 설립은 대한민국이 세계 미술계의 당당한 주체로 자리매김했음을 의미하며, 한국 현대미술을 세계에 알리는 안정적인 플랫폼을 마련했다는 점에서 큰 의의를 가진다.
커미셔너인 이일은 윤형근(회화), 곽훈(회화), 김인겸(조각), 전수천(설치) 등 총 4명을 참여작가로 선정하면서 한국관의 공간 특성과 ‘동양과 서양의 만남’이라는 주제의식에 부합하는 출품작가를 선별했고 ‘어떤 특정 유형이나 성향에 치우침 없이 각 장르별로 개성과 창의성을 존중했다’고 밝혔다. 이중 전수천의 설치작품 ‘방황하는 혹성들의 토우’는 신라시대 유물인 토우를 통해 한국인의 정신적 정체성을 탐구하는 동시에 네온 등과 산업 폐기물 등 현대 문명의 상징을 결합해 현대 사회 속에서 방황하는 정체성에 대한 고민을 시각적으로 표현했다. 이 작품은 단순히 과거를 회상하는 것을 넘어, 급변하는 사회 속에서 발전하는 듯이 보이나 소외되고 잊혀져 가는 전통적인 가치와 정신에 대한 작가의 비판적인 시각을 보여주고 있으며 우리 자신의 정체성을 성찰해야 한다는 메시지를 강력하게 전달했다. 무엇보다도 물, 나무 등 비디오 모니터에서 흘러나오는 자연의 이미지들은 현대 사회의 무질서하고 파편적인 모습을 직관적으로 비교할 수 있도록 하는 매개체로서 역할을 한다.

전수천은 1995년 국립현대미술관 제1회 올해의 작가로 선정되면서 작가적 역량을 인정받게 됐다. ‘올해의 작가’ 전시에서 ‘방황하는 혹성들 속의 토우’의 프로토타입, 즉 원형으로서 작품 ‘토우’를 선보인 바 있다. 이 전시를 통해 작가는 고대 그리스와 로마의 조각이나 불상의 파손된 조각 등 역사적 유물을 이용해 동양과 서양, 현대와 과거를 넘나드는 상상력에 기초하여 인간의 욕망과 좌절을 표현하였는데 ‘토우’는 처음으로 고대 유물인 토우와 산업폐기물, 네온등, 철, 조명, 필름사진이 벽면에 붙여진 설치작품으로서의 모습을 갖추고 있다.
‘방황하는 혹성들 속의 토우’는 1995년 서울을 시작으로, 베니스 비엔날레의 전시 이후 2000년대와 2010년대까지 개최된 국립현대미술관 과천관에서의 전시에서도 여러 차례 출품됐으며, 2025년 청주에 이르기까지 30년의 노정을 거치면서 약간씩 다른 모습으로 변주돼 선보이고 있다. 그럼에도 변하지 않은 것은 토우와 산업폐기물인데 특히 산업폐기물은 1995년에 수집된 것들로서 국립현대미술관이 잘 보관하고 있는 ‘작품의 일부’이다. 미술관이 이렇듯 엄청난 양의 쓰레기를 여전히 보관 중인 이유는 특별상을 수상한 작품의 원형을 보존하기 위한 노력 때문이다. 당시 한국미술은 국제 미술계에서 잘 알려지지 않았던 상황이었으므로 첫 개관한 국가관에서 특별상을 받은 것은 매우 이례적인 사건이었고 한국미술의 독창성과 예술적 수준을 세계에 알리는 계기가 됐다. 같은 시기에 팔라초 벤드라민 카르미니에서 한국현대미술 15인전 ‘호랑이 꼬리(Tiger’s Tail)’전시를 개최함으로써 베니스 비엔날레 관람객들에게 한국미술에 대한 호기심을 불러일으키기도 했고, 베니스의 카지노에서 열린 또다른 전시회에서는 백남준, 이우환을 비롯한 5명의 한국작가, 중국작가 4명, 일본작가 11명이 참가하여 한중일로 대표되는 극동아시아의 현대미술을 보여주었다. 특정한 시기에 서로 다른 한국현대미술전시가 개최되었고 이를 바탕으로 하여 이후 국제 미술계에서 한국작가들에 대한 관심을 불러 일으키는 중요한 시초가 되었다는 사실은 오늘날 시사하는 바가 크다.
1995년은 당시 김영삼 정부가 추진한 세계화 정책에 따라 한국 미술계가 국제적으로 도약하기 위해 활발하게 움직였던 시기다. 같은 해 광주비엔날레가 처음 출범함으로써 한국은 단순히 해외 주요 비엔날레에 참가하는 것을 넘어 국제적인 미술행사를 직접 개최하고 해외미술계와 교류하는 주체가 되었음을 표방했다. 이러한 세계화의 노력은 단순히 미술계만의 의지만이 아니라 정부, 기업 등이 합심하여 이루었던 일이었기에 오늘날 그 결실을 우리가 목도하고 체감하고 있는 것이다. 2025년 이제 다시 우리들은 새로운 씨앗을 싹틔우고, 꽃과 과일을 키우는 시기를 맞이하고 있다.
전수천의 작품 ‘방황하는 혹성들의 토우’는 국립현대미술관 청주관이 기획해 당산 생각의 벙커에서 11월16일까지 열리는 ‘청주프로젝트’ 전시에서 볼 수 있다.
★전수천(1947~2018): 정읍에서 태어나 어려운 집안 형편 때문에 중학교 졸업 후 학업을 포기했으나 고등학교 검정고시를 합격했고 입대해 베트남 전쟁에 참전했다. 제대 후 1978년 일본 무사시노 미술대학, 1981년 와코대학에서 미술을 전공했다. 1981년 도쿄 시오야 갤러리에서 개인전을 열었고 이후 미국으로 건너가 1986년 미국 프랫인스티튜트에서 석사를 졸업했다. 1989년 서울올림픽 1주년 한강 수상 드로잉전에 참여했고, 1993년 대전 엑스포 상징 조형물인 ‘비상의 공간’을 제작했다. 1995년 국립현대미술관 제1회 올해의 작가로 선정됐으며 같은해 베니스 비엔날레에 출품해 특별상을 수상했다. 2005년 미국 대륙 횡단 열차를 이용해 ‘움직이는 드로잉’ 프로젝트를 진행했다. 1993년부터 2011년까지 한국예술종합학교 교수를 역임했고 퇴임 후 2013년 전주에서 대안예술학교 AA(Art Adapter)를 설립했고 2017년부터 창작예술학교 비닐하우스 AA의 교장으로 활동했다. 2018년 런던 한국문화원에서 개최한 ‘사유의 공간’ 전이 마지막 개인전이 됐다.

▶필자 류지연은 국립현대미술관 청주관 운영부장이다. 1996년 국립현대미술관 학예연구사로 입사해 전시기획, 미술관교육, 소장품연구, 레지던시, 서울관·청주관 건립TF 등 미술관에 관한 거의 모든 분야를 섭렵하며 29년째 미술관을 지키고 있다. 영남대 미학·미술사학과에서 석사학위를 받았고, 영국 에식스대학교(Essex University)에서 미술관학(Gallery Studies)을 공부했으며, 서울대에서 미술경영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이화여대 겸임교수(2022~2023)를 비롯해 여러 미술관과 기관의 운영자문위원, 소장품 수집위원 등을 맡고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