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00세를 넘기면서 나도 모르던 몇 가지 변화를 느낀다. 내가 제자들을 기억하고 도와주기보다는 제자들이 더 오래 나를 기리고 위해 준다는 사실이다.
지난 3월이었다. 내 직접 제자들의 대부분은 학문이나 교육계에서 일하고 있다. 그중의 한 제자는 부친으로부터 물려받은 유업 때문에 여러 회사를 거느리는 기업가로 봉사하고 있다. 따져보면 다른 제자들은 학문과 교육계의 책임을 맡고 있어도 사업을 하는 제자는 슬하에 많은 사원과 그 가족까지 경제적으로 도와주는 부담을 안고 있어서 그 보이지 않는 영향이 더 큰 셈이다.
64년 전 가르친 제자들의 요청
지난 삶과 앞날의 책임 들려줘
사랑이 있는 교육이 세상 바꿔
함께 성장하며 교실 지켜 다행

그 실업가의 비서가 나를 찾아왔다. 한두 가지 선물도 전달받았다. 온 목적은 은사님이 노후에 혼자 계시는데 무슨 도움이라도 드릴 수 있을지 알아보라고 부탁을 했던 모양이다. 감사한 마음으로 이야기를 나누었다. 나는 “내 제자가 모범적인 기업인으로 존경받고 인간애, 윤리와 사회적 가치를 남겨 주기를 기도드린다. 다른 직업도 귀하지만 우리나라에서는 경제가 국가건설의 기반이 되기 때문이다”라는 심정을 말했다. 팔순을 맞이한 제자가 100세를 넘긴 스승의 노후 생활을 걱정해 주는 마음이 귀하고 아름다운 정을 두터이 해 준다.
비슷한 시기였다. 서울대학 법학과 60여 년 전 제자의 연락을 받았다. 3월 말쯤 61학번 동기들 모임이 있는데 법과 계통의 은사님들은 세상을 다 떠나고 기억에 남는 마지막 스승은 나뿐이어서 동창회에 초청하고 싶다는 사연이었다. 한 학기 동안 내 논리학 강의를 들은 것뿐인데 그래도 은사의 한 사람으로 기억해 주니까 반가이 응하기로 했다.
은사보다 연로해 보이는 제자들
그 동기 중에는 여학생이 한 명뿐이었는데 그 여학생이 회장이 되어 있었다. 은사라기보다는 아버지에 대한 자세로 반갑게 맞이해 주었다. 동기생 대부분이 모였고 몇 명은 미국에서도 왔다는 얘기다. 모두가 80대 중반이고 백발이 반 이상을 차지한 듯싶었다. 멀리서 보면 은사인 내가 더 젊어 보였을지 모르는 연로한 어른들이었다.
논리학이나 철학 강의는 할 수 없었다. 내가 지금까지 살아온 역사적 이야기와 앞으로 여러분과 함께 가야 할 사회적 책임을 얘기했다. “25세까지는 일본인의 지배가 아닌 ‘내 나라’에 살고 싶었고, 북한 공산 치하에서는 일본인 대신 공산정권이 집주인이 되었기 때문에 ‘내 나라’가 아니었다. 그래서 ‘나라다운 나라’를 위해 월남했다. 제자들과 함께 ‘나라다운 나라’를 위해 살았다. 지금은 권력 국가가 법치국가로 성장했고 앞으로는 후대들에게 ‘살고 싶은 질서 사회’를 물려 주고 싶다”고 얘기했다. “다 함께 후대를 위해 모범을 보여주면서 존경받는 여생을 이어가자”는 평소의 소원을 전했다. 50분 정도의 강의가 끝났을 때는 많은 박수가 터져 나왔고 한 아름 되는 꽃다발도 증정받았다. 수강생 모두가 일어서서 정중한 인사로 전송해 주었다. 내 인생, 마지막 강의를 끝냈다.
집에 돌아오면서 차 안에서 생각해 보았다. 64년 전에 한 학기 강의를 들었고 지금은 나도 마지막 강의를 한 셈이다. 그 당시 나는 41세의 젊은 나이였다. 교육계가 내 평생의 직장이었다. 스승다운 스승이 되는 것이 내 꿈이었다. 그래서 초등학교·중고등학교·대학 교육은 물론 사회교육에 동참한 지도 40년이 된다. 중고등학교 제자들은 모두 90세가 넘었다. 많은 제자를 키웠다. 그때 제자 중에는 정진석 추기경, 캐나다에서 한국인 최초로 정교수가 된 윤택순, 그와 친구였던 춘원의 자제 이영근 등 국내외의 교수가 10여 명이 넘는다. 연세대학에서는 내 제자의 제자들이 교수가 되었다. 제자 중 몇 교수는 총장이 되기도 했다. 모두가 나보다 훌륭하고 존경받는 지도자가 되었다.
조국 위한 역사적 삶이 모두의 의무
대학으로 진출하면서 중고등학교 교육이 소중했음을 깨달았다. 대학을 떠나 사회로 활동공간을 넓히면서 대학 교육의 국가적 위상이 어떤 것인지 알게 되었다. 100세를 넘기면서 사회교육의 일부분을 담당했던 것이 얼마나 필요했는지 감사하고 있다. ‘사랑이 있는 교육이 세상을 바꾼다’라고 체험했다. 사랑의 대상인 학생·제자들과 함께 공부하면서 성장하는 동안 교실을 떠나지 않기를 잘했다. 그래서 “총장의 존경을 받는 교수가 돼라”라고 후진에게 충고한다. 지금은 내 다양한 여러 방면의 사회활동이 학교 교육 못지않게 소중함을 체감하고 있다. 교실에서 만날 수 없었던 간접적인 제자들이 더 많아졌기 때문이다. 내 책의 애독자가 교실의 제자와 같이 나를 깊이 알아주며 감사해 한다. 내가 사회교육에서 한 일은 모두가 사회 각 기관에서 요청받은 심부름이었다. 감투도 없었지만 명예로운 직책도 맡지 못했다. 내 이력은 중앙학교 교사, 연세대학교 교수뿐이다. 그러나 한 가지 장점이 있었다면 나의 정신과 교육적 도움을 요청하는 사람들을 위해 정성 어린 공감과 사랑을 나누고 싶었다.
지금도 나에게 희망이 있는가. 지난 100년의 희망은 내 앞에 있었다. 지금은 나를 위한 시간은 끝나가고 있다. 그래도 더 큰 희망은 남아있다. 대한민국의 장래를 위한 수많은 후배·제자들을 향한 희망이다. 우리 모두에게 주어진 시간은 길지 못하다. 그러나 조국을 위한 역사는 영원하다. 그 역사적 사명을 위한 삶이 우리 모두의 의무이다.
김형석 연세대 명예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