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고향이란 버리기로 했다
일년에 몇 번 역마당에 서성대기도 했지만
끝내 고향이란 버리기로 했다.
돌을 깨어 오늘을 먹고 내일을 기다릴 뿐
손 끝에 스며드는 한기도 탓하지 않기로 했다.
고향이란 버리기로 했다.”
이 시는 내 친구 윤백이가 알려 준 시다. 그가 고등학교 때 내게 알려준 시인데 아직도 내 머릿속 한쪽 구석 폴더에 안전하게 자리잡고 생각날 때마다 한 번씩 읊어 보는 시다. 그의 시가 아니라 그가 알려준 시다. 이 시의 작가는 그의 고등학교 때 국어 선생님이었다. 그는 그 국어 선생님을 진심으로 존경했고 그 선생님의 시를 공책에 정자체로 베껴놓고 줄줄 외어 자랑하듯 내게 알려주곤 했다. 그는 말 그대로 문학 소년이었다. 당시에 고등학교 2학년부터 이과반과 문과반을 나누었는데 내 친구 윤백이는 문과로 갔지만 가끔 쉬는 시간이나 점심시간이면 이과반인 나를 찾아와 또 그렇게 자랑하며 시를 읊어대곤 했다. 그런 그 친구를 나는 무척 좋아했다. 사실 1학년 때 그를 만나 같은 지역의 친구가 되었고 친분이 두터워져 나는 그에게 내가 다니는 성당을 소개했고 그도 같이 다니고 싶다고 하여 내가 대부를 섰고 세례를 받게 하여 내가 그의 대부가 되었다. 대자 대부의 관계는 친구 이상의 관계이고 대부로서 책임감도 생기는 관계이다. 우린 그렇게 우정을 더욱더 쌓아갔고 그가 대학을 갔고 나는 재수를 하게 되어 만남이 뜸해졌고 서로의 관계는 소원하게 되었다. 그는 똑똑한 친구였고 공부도 잘했다. 그리고 학교에서 여자를 만났다고 했고 어느새 미국에 있는 삼촌의 초대로 미국으로 이민도 갔다. 그렇게 그는 열심히 잘 살았다. 아니 내가 그는 잘살고 있다고 생각했다.
시간은 퀀텀 점프하여 나는 예수회 입회하여 양성 과정 중에 신학 공부를 하러 미국 버클리로 갔다. 당시 윤백 부부는 딸을 낳아 키웠고 둘 다 로스앤젤레스시 공무원이 되어 있었다. 미국 동포 사회에서 부부가 주류 공무원이 된 이 부부를 부러운 눈으로 바라보았다. 방학이 되어 그가 나를 초대했을 때 나는 너무 기뻐 기꺼운 마음으로 비행기에 올랐다. 작은 집이었지만 갓난아이와 부부는 열심히 사는 듯했다. 그렇게 우리는 서로의 인생을 점검했다. 그 후 시간이 흘러 나는 천주교 수도사제가 되었고 들려오는 소식으로 그는 미국에서 이혼을 했고 한국에서 사업을 한다고 들어와 있었다. 그 시점에 한 번 만나 서로의 삶에 대해 나눴는데 글쎄 나이가 나이니 만큼 서로의 생각은 많이 달라져 있음을 확인했고 대화 중간 중간 언쟁 비슷한 것도 했다. 나의 마지막 대사는 이랬다. “너 조선일보 끊고 머리 속을 깨끗하게 하지 않으면 나 만날 생각하지 말아!” 나는 사제로서 우리 사회가 좀 더 나은 사회가 되도록 나른 미약한 힘이지만 보태려고 애쓰는데 이런 나의 모습을 조롱하며 웃었다. 어디서 그런 무례한 태도가 나오는지 너무 놀랐지만, 이 녀석이 미국에서 이혼하고 다시 한국으로 와서 삶의 무게로 심기가 복잡해서 그러려니 했는데 중간에 어떤 한 이슈에 대해 조선일보에서 이러저러하게 썼다는 것을 근거로 아주 강력하게 이야기하는 것을 보며 깨달았다. 아~! 이것은 세뇌당한 것이구나~! 그 후 또 시간이 흘러 소식이 들려왔다. 이제 그는 일용직 노동자가 되어 열심히 땀 흘리며 살고 있다고. 아, 내 대자가 노가다를 뛴다고!!. 나름 대학을 나오고 공부도 잘해 이민을 가서 미국 공무원이 되었던 녀석이 어떻게 노가다를 뛰고 있을까? 그 후 술 취한 소리로 내게 전화를 하곤 했는데 그것도 벌써 5, 6년 전 일이다. 얼마 전 4월 16일이 지났다. 세월호 유족들 앞에서 치킨을 시켜 먹던 무뢰배들, 그리고 지난 1월 19일, 서부지법에 난입했던 젊은이들 그리고 지금 노가다를 뛰고 있을 윤백이가 겹쳐 보인다. 거짓 언론에 속아 넘어가 폭삭 망한 이들. 한없이 슬프다. 신발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