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대 시험’ 없던 조선에선 의사를 어떻게 키우고 활용했을까

2025-03-23

조선시대 의관을 선발할 땐 의과(醫科) 시험을 치렀다. 여기에 합격하면 왕실 및 조정 관원들의 진료와 각종 약재 취급, 의서 편찬 등을 담당하는 전의감에서 일할 수 있었다. 뛰어난 자질을 보이거나 천거를 받으면 왕실 전속 의료기관인 내의원에서 일했다. 그러나 이것만으로는 높은 수준의 의서(醫書)를 독해하거나 편찬·보급하는 데 한계가 있었다.

이에 따라 세종 때 의서습독관(醫書習讀官)이라는 제도가 도입됐다. 젊은 인재에게 봉급을 주며 의학 서적을 학습시켰고 이들이 바탕이 돼 전문 의술이 활성화됐다. 양질의 의료 전문가를 국가가 직접 육성한 것이다. 이렇게 교육받은 뒤에 별도의 과거를 치르거나 특별 채용되는 식으로 일반 관직에 진출하기도 했다. 조선에서 의학은 유교 사회의 덕목인 인(仁)을 의술로서 실천하는 것이었고 유학자와 의사 간에는 경계선이 없다시피 했다. 서애 유성룡(1542~1607) 같은 학자들이 『침경요결』 같은 의료서적을 종종 펴낸 이유다.

조선시대 의료 체계를 돌아보고 다양한 유의(儒醫·유교에 통달한 의사)와 의관들의 활동을 엿볼 수 있는 전시가 서울 강서구에 위치한 허준박물관에서 지난 21일 개막했다. 박물관 설립 20주년 기념 ‘조선의 의사들, 인(仁)을 실천하다’ 특별전이다. 구암 허준(1539~1615)이 집필한 『동의보감』 『신찬벽온방』(보물) 등 박물관 소장품과 한독의약박물관 등에서 대여한 유물 등 총 105점이 선보인다.

전시는 대체로 조선시대 의료인 육성·관리가 어떻게 이뤄졌나에 초점을 맞춰 책자·공문서 등을 소개한다. 예컨대 내의선생안(內醫先生案)은 내의원에서 근무하며 의약을 관장했던 인물들의 인적사항을 기록한 명부다. 허준이 서문을 썼고 그가 편찬한 것으로 추정되는데, 이후 추가된 기록까지 더해져 총 316명이 수록돼 있다. 이들의 본관·출생연도 뿐 아니라 직계·방계 가족까지 적혀 있어 왕실 주치의에 대한 일종의 ‘인사 검증’을 엿볼 수 있다.

가장 주목할 것은 3부 ‘지방에서 활동한 의사들’ 소개다. 수도 한양에 비해 의원과 약을 구하기가 훨씬 어려웠던 지방에선 유의들이 앞장서서 의료환경 개선에 힘썼다. 대표적으로 경북 상주에 위치한 존애원이 있다. 임진왜란 직후인 1599년 상주 지역 사족·선비들이 설립한 우리나라 첫 민간 의료기관이다. 건립 당시엔 숙박시설과 약재 창고 등이 함께 있었지만 지금은 건물 1동만 전한다. 전시에선 존애원 현판(상주박물관 소장)이 ‘존심애물(남을 사랑하는 데에 마음을 둔다)’의 정신을 드러낸다.

조선 후기엔 다양한 계층에서 의료 수요가 생겨나면서 혜민서를 비롯한 공적 의료기구가 감당 못 하는 일을 민간이 해결하게 됐다. 특히 약을 구입하는 게 어려워 아예 계까지 조직했다. 가장 유명한 게 ‘강릉 약계’로 1603년부터 1842년까지 240년이나 지속됐다고 한다. 초창기엔 계원의 부모에게 약을 지급하는 것으로 한정됐지만 점차 가족 모두에게로 확대됐다. 이 같은 지방 약계는 조선 후기에 사설 약방이 늘어나면서 사라졌다고 한다.

침을 보관하던 침통이라든가 시신을 검시할 때 쓴 사각유척(놋쇠로 만든 사각 기둥 모양의 자) 등 실제 의료 때 쓴 유물도 있지만, 서적·자료 위주라 ‘볼거리’가 많진 않다. 허준 이외에 조선시대 활약한 명의들의 면면을 디지털 애니메이션으로 제작·상영해 이해를 돕는다. 김충배 허준박물관장은 “조선시대 의술은 유교의 핵심 덕목인 ‘인의예지’에 바탕을 두고 실천한 것”이라며 “비록 과학지식이 부족하던 시대지만 인의 정신 덕에 사회가 지탱했다는 점을 새삼 되새기게 된다”고 말했다. 전시는 9월 7일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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