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거 중국에 존속했던 '보갑제(保甲制)'에서 '갑(甲)'은 100호(戶)다. 100가구를 10개씩 다시 묶은 1000호(戶)는 '보(保)'다. 인구 파악과 세금 징수의 편의를 위해 송나라 때 처음으로 도입했다. 유명무실하다가 청나라 건륭제(乾隆帝. 1711~1799)에 이르러 제대로 시행된다.

이번 사자성어는 관즉득중(寬則得衆. 너그러울 관, 곧 즉, 얻을 득, 무리 중)이다. 앞 두 글자 '관즉'은 ‘만약 관대하면, 이로써 '곧'이란 뜻이다. '득중'은 '많은 사람들의 마음을 얻다'란 뜻이다. 이 둘이 합쳐져 '너그러우면, 많은 이들로부터 지지를 얻을 수 있다'란 의미가 성립한다. 건륭제는 '논어(論語)'에 나오는 이 네 글자를 통치 철학으로 삼았다.
건륭제는 강희제(康熙帝. 1654~1722)의 손주로 태어났다. 많은 업적을 남긴 강희제에겐 100명이 넘는 손주가 있었다. 대부분 손주가 할아버지의 얼굴을 직접 볼 기회조차 갖지 못했지만, 건륭제는 강희제의 사랑을 독차지했다. 총명하고 몸놀림이 민첩해 누가 봐도 평범한 아이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강도 높은 황실 내부의 '소수 정예반' 수업 참여 기회가 어린 그에게 특별히 제공됐다. 이 소수 정예반은 일 년에 엿새만 쉬며, 새벽 4시 전에 기상해 5시부터 하루 10시간씩 계속된다. 덕분에 그는 사서오경(四書五經), 당송팔대가(唐宋八大家)의 문학 작품, 이십사사(二十四史), 검술, 만주어, 몽골어 등을 체계적으로 익혔다.

건륭제의 모친은 만주족이었으나 신분이 낮았다. 부친 옹정제(雍正帝. 1678~1735)는 황제로 즉위하기 전 젊은 시절에, 하녀 신분이던 여인을 만나 그를 얻었다. 강희제는 임종을 앞두고 '훗날 건륭제에게 황위를 꼭 계승토록 하라'는 유지를 옹정제에게 남긴다.
13년 동안 재위하던 옹정제가 57세에 갑자기 세상을 떴다. 이어 24세 젊은 나이로 즉위한 건륭제는 장례 절차가 채 끝나기도 전에 부친의 정책을 바꿔나가기 시작한다. 철두철미한 성격에 차가운 공포 정치로 모든 고위 관료를 '고양이 앞의 쥐' 신세로 전락시키곤 하던 옹정제의 통치 방식에 그가 평소 문제의식을 갖고 있었기 때문이다. 부친의 정책들을 신속히 바꿨지만, 사람은 교체하지 않았다. 옹정제 통치기의 대신들 대부분은 지위를 그대로 유지할 수 있었다.

일찍 기상하는 습관이 밴 그는 절도 있는 생활을 계속 이어갔다. 새벽 4시면 기상하여 정무를 챙기기 시작했고, 점심 식사 전까지 바쁜 일정을 소화했다. 그러나 오후엔 정무를 보지 않았다. 시, 서예, 그림 등 취미 활동에 시간을 썼다. 장수한 모친의 처소에 매일 3번씩 들러 안부를 물을 정도로 효심도 지극했다. 그 역시 건강을 유지하며 88세까지 장수했다.
그의 통치기는 전기, 중기, 후기 이렇게 세 시기로 나뉜다. 37세까지, 재위 첫 13년을 그는 인자함과 관대함을 기조로 삼아 업무에 임했다. 이런 통치가 이어지자 관료들의 업무 태도는 차츰 해이해졌다. '관즉득중'이 옳은 말이긴 해도 만병통치약은 아니기 때문이다.
인간의 본성이 본래 착하지만, 나빠질 가능성 또한 있다. 이 진리를 늘 경계하던 그에게 하루는 고발장이 하나 도착한다. 노골적 부패 관료를 고발하는 내용이었다. 화가 난 그는 대신들을 이렇게 질책했다. "짐이 성심으로 국정에 임했건만, 너희는 어찌하여 짐을 이렇듯 무능하고 어리숙한 황제로 만드는 것이냐?" 그는 통치 기조를 전환하기로 결심한다.
중기 이후 그는 역사 속의 어느 황제보다 과감하고 냉정한 방식으로 부패 관료들을 처벌했다. 어떤 성역도 없었다. 중기 이후, 관료들이 감히 그를 기만할 엄두를 내지 못했다. 70세가 되자 그는 매사에 느슨해졌다. 자연스럽게 후기의 정책 기조 또한 다시 관대해졌다.

약 8억 자(字)에 달하는 '사고전서(四庫全書)' 편찬 등 건륭제는 누구보다 내실 있는 성취를 이룬 황제로 역사에 기록되고 있다. 일단 통치 기조가 옳았고, 그에 따른 부작용을 장기간 성공적으로 차단한 덕분이 아닐까 싶다. 관즉득중. 이 말이 현실에서 실제로 빛을 발하려면, 분명 관대함 이상의 무언가가 필요하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