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왕조의 지배층은 사대부(士大夫)였다. ‘사’는 독서인이자 지식인이고, ‘대부’는 정부 관리나 정치인이다. 사제와 기사가 지배층을 형성했던 대부분의 서구 전근대 사회와 다른 점이다. 이들 사대부 중에 일종의 ‘명예의 전당’에 오른 이들이 있다. 정치인·관리 중에 종묘에 배향된 이들과, 지식인 중에 문묘에 배향된 인물들이다. 후자가 전자보다 수도 훨씬 적고 사회적으로 더 명예스럽게 여겨졌다. 문묘는 유교를 창시한 공자의 사당이다. 성균관과 향교에 있는 문묘에 조선시대를 통틀어 모두 14인이 선정됐다.
기묘사화(1519) 이후 명종 대까지 거의 50년 동안 사림은 탄압받았다. 하지만 사화가 이어지는 중에도 사림은 사회적으로 성장해 여론 주도층이 됐다. 결국 선조 즉위(1567)와 함께 정치적 힘을 회복해 조정에 다시 나왔다. 그즈음 성균관 유생들이 김굉필·정여창·조광조·이언적 네 사람의 문묘 종사(從祀)를 청하는 상소를 올렸다. 성균관 유생은 문과 급제 전의 젊은 지식인들이었다. 당시 사회적으로 이들의 목소리는 존중됐다. 아직 당파적 이해관계에 얽매이지 않은 공정한 의견으로 인식됐다. 이들은 위 네 사람을 새 시대를 상징하는 존재로 조정이 공식적으로 인정하기를 요구했던 것이다.
성균관 유생들의 상소가 몇 차례 계속되자 막 즉위한 17세의 어린 선조는 72세의 영의정 이준경에게 의견을 물었다. 위의 4인 중에서 이준경이 특히 김굉필에 대해 언급했던 내용은 주목할 만하다. 시대 전환기에 놓였던 당시 조선 조정과 사림 집단의 분위기를 엿볼 수 있다.
“신라로부터 고려까지 문장에 능한 선비는 많이 나왔으나 의리의 학문은 실로 김굉필이 열었습니다. 김굉필은 제일 먼저 성현의 학문을 흠모하여 구습은 모두 버리고 <소학>에 마음을 다했습니다. 명예와 (벼슬과 녹봉의) 이끗을 구하지 않고 모든 행동을 반드시 예법에 따르며, 늘 깨어 있는 마음으로 오래도록 힘을 쌓아 도덕을 이루었습니다. 불행히 난세에 화를 당하자 조용히 죽음에 임했습니다. 비록 세상에는 포부를 펴지 못했지만 그 마음속에 바른 신념이 있었음을 그가 죽음을 대했던 자세로 증명할 수 있습니다. 또 제자들 가르치기를 게을리하지 않아, 우리나라 선비들이 성현의 학문이 있음을 알게 된 것은 실로 이 사람의 공입니다.”
살아 있을 때, 김굉필(1454~1504)은 세상 기준에서 실패자였다. 양반집에서 태어났지만 늦은 나이에 문과도 아닌 생원시에 합격했을 뿐이다. 41세에 추천으로 낮은 관직에 임명되지만 4년 뒤 일어난 무오사화로 평안도에 유배됐다. 유배 상태에서 6년 뒤 갑자사화가 일어나자 극형에 처해진 것이 그의 전 생애였다. 글이 뛰어났던 것도, 벼슬이 높았던 것도 아니다.
이준경은 사림의 일원은 아니었지만 그 원칙에 공감했던 공직자였다. 글재주를 익혀 세상의 명예와 이익을 추구하지 않고, 모든 행동을 바르고 성실하게 하여 죽음 앞에서도 굴하지 않았던 김굉필을 그는 높이 평가했다. 흔히 기리는 행위는 기리는 대상만큼이나 기리는 주체를 드러내는 법이다. 사림이 김굉필을 기렸던 것은 이제 막 시작된 사림의 시대에, 사회적 정치적 대안 세력으로서 사림의 정치적 윤리적 지향과 개인적 삶의 태도를 비춰준다.
작년 12월3일 이후 진행된 상황은, 대한민국 사회를 구성하는 여러 층위의 단면을 보여주었다. ‘엘리트’ 집단 구성원 일부의 행위는 충격적이다. 공적 영역의 최정점에 있는 이들이 보인 전혀 공적이지 않은 반공동체적 행위를 많은 사람들이 지켜보고 있다. 하지만 늘 그렇듯, 일어날 만한 일이 일어나는 법이다. 그들은 한국의 교육에 심각한 문제가 있음을 입증하는 근거이다. 그럼에도 문제의 원인을 그들 개인에게만 묻는 것으로는 부족하다. 공동체 차원에서 민주주의와 엘리트에 대한 논의가 필요해 보인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