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단체장들이 취임하면서 “철저히 정치적 중립을 지키겠다”고 선언하곤 한다. 객관적이거나 세련되게 들릴 수도 있지만, 대한민국 수준에서 ‘정치적 중립’은 그렇게 곱다란 자세가 아니다. 그 단체장이 ‘소위 우파’ 성향이라면 무기력하고, ‘소위 좌파’ 성향이라면 사악하다. 좌·우파 갈등 구조에서 중립이나 합작을 도모한 결과는 모두 좌파(공산화)로 귀결된다. 폴란드, 체코, 헝가리, 베트남, 중국이 그랬다.
왜 ‘우파’와 ‘좌파’가 아니고, ‘소위 우파’와 ‘소위 좌파’인가? 좌나 우나 모두 겉모습만 그렇지 이념적 철저성이 전혀 없기 때문이다.
좌나 우나 이념적으로 철저함 부족
6·25전쟁 규정도 못한 ‘소위 우파’
북한 앞 인권도 눈감는 ‘소위 좌파’
국가정체성에 대한 합의 일치 실패
우파는 지킬 가치가 있는 것을 지켜가면서 나라를 발전시키려 한다. 당연히 지킬 가치가 있는 것을 계승하고 확산할 교육에 힘을 쏟는다. ‘소위 우파’는 교육에서 손을 놓은 지 이미 오래다. 교육의 주도권은 이미 ‘소위 좌파’가 차지했다. 우리나라 국민이 자유민주주의 체제를 자신이 지켜야 하는 것으로 인식한 최초의 사건은 6·25다. 중국은 6·25를 항미원조 전쟁으로 이름 붙이고, 북한은 조국해방 전쟁으로 이름 붙였다. ‘소위 우파’는 아직 아무 이름도 안 붙였다. 세상에서는 이름 붙이는 자가 이름 붙이지 않는 자를 압도한다. 우파의 책무는 사회 변화에 맞는 어젠다를 먼저 세우고 완수하는 것이다. ‘소위 우파’는 대표적으로 복지 어젠다를 잡지 않았다. 복지가 주요 문제로 부각할 때 정치적 주도권을 잡을 수 없는 것은 당연하다. 마땅히 ‘해야 할 일’을 하지 않은 결과, 대한민국에서 ‘소위 우파’는 이미 유효기간이 지난 곽 우유에 불과해졌다.
좌파는 보편적 가치와 이념을 지향하는 방식으로 공동체의 발전을 도모한다. 그래서 좌파에서 인권은 언제나 필수 가치다. 하지만 ‘소위 좌파’는 인권을 주장하다가도 북한 인권만 나오면 눈을 감는다. 어선을 타고 북한을 이탈한 대한민국 국민을 북한 당국의 요구에 따라 그대로 돌려보냈다. 대한민국 공무원 이대진씨가 북한에 의해 살해되는 것을 방조하고, 더 심하게는 월북으로 조작하려고 했다. 북한과 관련되기만 하면 ‘소위 좌파’는 국민 보호도, 인권도 안중에 없다.
좌파의 이념 가운데 중요한 것 하나는 반핵이다. 하지만 북한의 핵은 용인하는 정도가 아니라 개발하는 데에 도움까지 준다. 대한민국 핵에는 강하게 반대하고, 원자력까지 금지한다. 6·25전쟁에서 대한민국을 적으로 놓고 싸워 북한 정권으로부터 공훈을 받은 김원봉을 찬양하고 기리면서 대한민국을 세우고 지킨 이승만, 박정희, 백선엽 등은 적대한다. 어느 도시에서는 조선인민군 소속으로 대한민국을 적으로 놓고 싸웠던 정율성을 국민 세금으로 기념하고 있다.
‘소위 좌파’는 대한민국을 적대시한 사람과 세력에 종속하는 태도를 유지한다. 긴 시간 민족의 정통성을 대한민국보다는 북한에 둬 왔다. 이런 상황에서 임수경의 밀입북을 돕고, 주체사상으로 무장한 임종석은 대통령 비서실에서 외교안보 특별보좌관을 맡고, 후에는 대통령비서실장을 맡는다. 문재인 대통령은 지도이념을 주체사상에 두고, 최고의 목적을 사회주의·공산주의 건설에 두었던 통일혁명당 사건의 핵심 인물인 신영복을 최고의 사상가로 치켜세우고, 그의 필체로 대한민국 최고 정보기관인 국정원 표지석을 바꿨다. 대한민국의 사회주의 혁명을 목표로 하는 사노맹(남한사회주의노동자동맹) 출신이 ‘소위 좌파’ 대통령 시절 대한민국의 법무부 장관이었다.
‘소위 좌파’는 좌파적 이념에도 진실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대한민국에 적대적 태도를 취하기까지 한다. 그들에게 대한민국은 없다. 대한민국 정체성을 훼손하고 헌법을 위반한 문재인 대통령에 대한 탄핵이 시도되지 않은 것은 대한민국의 정치가 건강해서가 아니라 병들어서다. ‘소위 좌파’는 자유민주주의 대한민국에서 ‘해서는 안 되는 일’을 해 왔다.
‘소위 좌파’는 대한민국을 사회주의로 바꾸려는 꿈을 해방 후부터 지금까지 한 번도 포기하지 않았고, 일정 정도 성공했다. 한 개인의 성장에 가장 중요한 것이 자기가 누구인지를 아는 것이듯이, 한 국가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그 국가의 정체성에 관한 일치된 합의다. 이것은 수학의 구구단과 같다. 우리에게는 이것이 없다. 대한민국 모든 갈등의 뿌리가 바로 여기에 있다. 어떻게 된 노릇인지 대한민국에서는 이 뿌리를 제대로 마주하지 않으려는 기풍이 있다. 이는 매우 비겁하거나 나약하다. 뿌리가 약하면 나무는 제대로 크지 못하고, 언젠가는 뿌리까지 뽑혀서 자빠질 것이다. 정체성에 대한 일치된 합의도 없이 ‘해야 할 일’을 하지 않은 집단과 ‘해서는 안 되는 일’을 하는 집단이 서로 잘났다고 싸우는 나라가 어찌 잘될 수 있겠는가. 구구단도 외우지 못하는 실력으로 방정식을 풀겠다고 덤비는 것이 아닌지 모르겠다. 대한민국에서는 대한민국을 중심에 놓고 살자는 말이 왜 이렇게 하기 어렵게 되었는지.
최진석 새말새몸짓 기본학교 교장